(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떠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왜 그런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을 왜 알아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닮아야 할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사람을 다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기적)을 보고서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님은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이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표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또 그리스도로 믿는 것에 있어서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고 주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신앙에 몸을 맡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아신다는 것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먹는지를 안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것도 따지고 들면 모를 일도 아니지만 그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을 아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아신다는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 목적을 알면 다 아는 것이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 망치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컴퓨터로 계산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의 요구사항을 이루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 컴퓨터를 아는 것이다. 그러면 망치 사용 기술이나 컴퓨터 활용 능력이 다른데 어떻게 그것으로 안다고 할 수 있느냐 하겠지만, 망치나 컴퓨터나 그 사용하는 방법이나 기술이 무궁하고 수준 높은 활용이 다른 것이 바로 믿음의 분량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의 장성함이 다르다는 것이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니, ‘시험에 합격해야 하는 것을 아신다.’와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럴 수 있는 분이라는 증거가 필요한데 그 증거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죽었다 살아나신 능력을 증거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믿음에 몸을 의탁하시지도 않고, 그런 증거를 받으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시험에 합격하는 것, 돈이 필요하다는 것, 권세가 필요하다는 것,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영광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표현되는 모양의 단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죽었다가 다시 사신 능력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다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증거가 필요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예수님은 그런 것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아시는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아시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에는 기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순종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이 사람 만드실 때에 목적으로 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에 너무 좋아 하신 것이라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 사람들의 빛이신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적들이 일어 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두움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의 기적을 인하여 믿는다.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대로 기적이 아니면 안 되는 것, 즉 초자연적인 현상이 없는 중에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방언을 못하면 구원이 없다는 것처럼. 이것은 사람의 육신을 부끄럽고 연약하고 추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상태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너머의 기적을 바라고, 그것이 있어야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어두움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욕심을 가졌다는 것이나, 음란한 생각을 하는 것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그것을 억제하려 해도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죄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함정에 빠트린 것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죄인인 것은 오히려 그런 모습들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사람에게 욕심이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의에 대하여 욕심을 가져야할 때 그 본성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고, 성욕이 있는 것은 육신으로 결혼하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이어갈 사람을 낳기 위함과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표현하기에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은 어떤 목적 아래에서 그것이 사용되는지가 핵심이지, 그것이 있다는 것 자체로 사람을 부정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획일적으로 보는 것, 육신의 형식에 관하여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는 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


사람에 관하여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다.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다. 그냥 삶이 주어졌으니 숙제하듯이 살아내는 것, 그 살아내는 것에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하는 것에 인생을 소비하는 것이 삶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 정말로 그것은 아니다. 이것을 모르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것이다. 정말로 이것은 울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존재 이유를 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사람이라는 것에 관해서나,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증거가 필요가 없는 분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사람이 무엇인지,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면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서 넘칠 것이라고 하셨다. 증거가 없어도 인생의 목적을 아는 사람, 증거를 받은 믿음이 아닌 약속을 받은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 안에 있어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자 목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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