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이 땅위의 버전인 교회가 영원하지 않다니 그것이야 말로 정말로 멍청한 소리가 아닌가? 하지만 교회는 영원하지 않다. 아니 영원할 수도 없고, 영원히 보존하려 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the Church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a church에 관한 이야기다.
원론적으로 아니 성경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교회는 영원하다. 하나님 나라의 이 땅위의 버전으로서 교회는 영원한 것이다. 교회가 영원하지 않다면 신앙도 다 소용없다. 이 영원한 교회는 어디까지나 the Church에 관한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the Church와 a church에 대한 구분 없이 자기가 몸담은 교회가 영원해야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멍청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the Church와 a church는 뭐가 다른가? 형편없는 영어능력의 소유자지만 이 정관사 the와 부정관사 a(n)의 차이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영문법에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이 개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the Apple이 있고 a apple이 있다. the Apple은 사과라는 종의 대명사다. 이때 the Apple은 실존하는 개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a apple이 실존하는 개념이다. 모든 apples가 가진 생명의 본성, 그 정체성이 바로 the Apple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the Church와 a church 역시 같다는 것이다. 모든 churches의 속성과 본성 그리고 정체성이 바로 the Church이다.
A church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 영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 부정관사가 붙는 모든 존재가 영원하지 않음과 같다. 또한 the Church가 영원한 것 역시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사라지지만 그 정체성은 언제나 영원하다. 사람도 나고 죽기를 일상 같이 하나, 사람이라는 생명은 영원하고, 사과 역시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먹어치우지만 사과는 언제나 영원하다. 이것이 생명의 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의 주님이시다.
우리 모든 사람은 사과를 영원하게 보존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영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원하게 하려고 사과 한 알을 보존한다고 사과가 영원해지는 것이 아니다. 맛도 사라지고 수분도 사라질 것이다. 뭐 과학적으로 진공 상태나 특수하게 보관한다고 치자, 누가 사과를 그렇게 할 목적으로 재배하는가? 그냥 먹어치우려고 재배하지.
예전에 진시황제가 죽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어이없는 노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는지 역사가 알려주고 있다. 그렇듯 생명은 그 정체성이 영원한 것이지 그 개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이것에 생명의 법인데, 생명의 주님이 머리되신다는 교회들은 어이없게도 각 개교회가 영원하여야할 것처럼 애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 보라. 다 쓸데없는 짓이다. 교회는 언제나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 그리고 교회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고 the Church가 영원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본질인지 모르니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영원해야 할 것처럼 생각하고 노력한다. 본질도 생명도 하나님도 교회도 뭔지 모르는 멍청이들의 노력이다.
이 멍청함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먼저는 그렇게 a church를 지키기 위하여 양심도 버리고, 사람도 버리는 교회들의 가치관이 그것이고, 또 하나는 그런 교회에 말씀도 신앙도 없다고 느끼면서도 꿋꿋이 다니는 사람들이다. 나도 그런 사람의 하나였다.
A church를 지키기 위해서 양심을 버리는 모습은 가을 길 낙엽만큼이나 많다. 세습도 그렇고,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고 그것을 지탄하는 세상의 소리를 ‘하나님을 모르는 소리, 사탄의 소리’로 일축하는 너무나 용감한 교회들도 그렇다. 때론 자기 교회 목사를 지키기 위해서 세상과 또 양심과 싸우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버리기도 한다. 교회가 가는 길과 신앙이 다르다고 사람을 내친다. 신앙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에게 바른 답을 해주지 못하는 실체를 들킬까 싶어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강조하고 ‘의심하는 자’로 치부한다.
그렇게 교회를 지키려고 할 때는 지킬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재산이 있거나, 명예가 있거나, 아니면 랜드마크 수준의 교회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있거나. 하지만 잊지 마시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심과 죽고자 하는 자가 살 것이라고 하심을. 그것도 인정이 안 되면 십자가를 기억하라.
십자가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곳이 십자가다. 하나님의 아들을 지키는 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 그 구원의 의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표상이 교회라는 것이라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십자가를 떡하니 걸어 놓거나 아니면 교회 종탑 위에 높이 세워두고서 십자가의 도는 버리는 이 어이없는 상황이 오늘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회들의 모습이다. 이것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렇다면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멍청했던 필자와 같이 a church에 뼈를 묻겠노라며 두 번이나 긴 삶을 살 것이 아니다. 어떤 교회는 그 정체성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다. 그 기준은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어떤 교회를 선택해야 하는지 궁금하다면 가서 평안한가를 생각하면 된다. 내가 평안하다면 누군가는 십자가의 도로 나를 섬기는 사람이 있는 교회다. 그런 교회를 찾아야 한다. 목사가 있어야 하고 장로가 있어야 하고 건물이 있어야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다 회칠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궁금한 것을 듣기에 평안하면 된다. 그게 안식이다. 그래야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평안하지도 않고 가르쳐주는 것도 없는데, 그래도 건물도 있고, 목사도 있고, 장로도 있는 교회에 가야한다며 인생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바로 한 알의 사과를 영원하게 보존하려는 것이고 사람이 죽지 않으려 하는 것이고 a church를 영원하게 하려는 것이다. 생명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A church는 영원하지 않다. 아니 그것은 영원할 수 없다. 그것을 영원하게 여기면 오히려 영원한 the Church를 볼 수도 없고, 누리지도 못한다. 하나님의 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하다. 그 하나님의 의가 영원한 이상, 유한한 삶을 가진 사람들은 그 영원함을 거치듯 사는 것이다. 한 알의 사과가 이 땅에 열매로 맺혀서 누군가의 양식이 되어도 그 사과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사과인 것과 같이, 교회도 우리 인생도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의의 본질 속에 살면 우리가 죽어도 영원한 생명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영원함의 비밀이다.
그러므로 a church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을 버리지도 말고, 양심도 버리지 말자. 또한 자기가 다니는 a church가 영원할 것처럼, 또 자기 신명을 다해서 지켜야할 것처럼 여기지도 말자. 교회도 육신을 가진 인생도 하나님의 의와 나라와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소비되어질 때 온전한 것이다. 육신, 형식을 가진 만물의 본분이 그것이다. 물론 a church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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