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신앙을 학문으로 공부한 목사가 있어야 교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회의 설립 요건으로서 목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세상의 가치관에 물든 지금의 교회야 목사가 있어야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는 목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과일 가게에서 사과는 사과대로, 포도는 포도대로 모으는 것은 사과라는 정체성으로 또 포도라는 정체성으로 모으는 것이듯,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아는 이들이 모이므로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아주 자생적이다. 교회가 가르치고 그 안에서 나누는 것이 정말로 진정한 복음이라도 생명이 가진 고유한 능력인 자생적인 변화를 벗어나서 강제되거나 Have to 혹은 ‘~게 되어야만 한다.’와 같은 것으로 한정되기 시작하면 제 아무리 제대로 된 복음도 율법이 된다. 이것은 방향이 반대이다. 생명은 본성으로 인하여 표현되는 법에 있고, 강제되고 한정하는 것은 표현을 정하고 그것에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삶에는 두 번의 교회가 있었다. 말 그대로 과거형이다. 처음에 있었던 교회는 말 그대로 율법적인 교회다. 교리가 있고, 교리에 따라 건물과 제도를 세워서 된 교회다. 그리고 그 가르침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인 교회다. 한 마디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회들 중의 하나였다.
그곳에서 나 나름으로의 열심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고, 또 많은 성공도 이루었다. 예를 들면 방언과 같은 것들. 그러나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만족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건 참 슬픈 일이었다. 쳇바퀴 속의 다람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것은 율법이었고, 그 율법은 세상의 성공을 이끌어내기 위한 주술이었을 뿐이었다. 난 그것을 버렸고, 인생존재 목적을 회복하는 최대의 성공을 행한 제대로 된 첫걸음이었다.
두 번째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행위가 아니라 존재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것은 신앙의 대 전환이었다. 지금 이렇게 블로그를 써 내려 가는 모든 근본이 거기서 시작되었다. 또한 그 교회의 시작은 말 그대로 생명의 법이었다. 되어야 하는 것이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대로 서로가 용납하는 세계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성공에 도취된 탓인지는 몰라도 이 놀라운 복음이 다시 율법이 되었다. 군복을 입혀서 군인을 만들려고 하는 일반적인 교회와는 달랐지만 무조건 군인이 되어 군복을 입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물론 군인이라 비유된 것은 복음의 참 생명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도 예수님도 그것을 강제한 것이 아니라 본을 보이시므로 사람 스스로가 그렇게 되고 싶도록 고백하는 세계가 진정한 복음의 세계요 십자가의 도(道)이건만 거기서 점점 벗어나고 있었다. 사울왕처럼.
‘복음은 이런 것이니 너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은 선포되는 말씀을 넘어 강제되는 말씀이 되고, 그것을 따라 오지 못한다고 여겨지면 이내 적으로 간주되고 압박하여 고백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교회를 지켜가려는 즈음에 교회에 나름의 재산이 생기기 시작했고, 주류를 이루던 청년들이 사회인이 되면서 교회가 가진 것들을 지키려는 노력들이 파생되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지키시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건만 사람들이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교회의 처음에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많았다. 그러나 교회를 지키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그 아름다움들이 사라졌다. 단 1%만 그 사람의 인생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고백이 있다면 같은 생명을 가진 형제들이라는 사랑은 희미해져갔고, 그것이 희미해져가는 만큼 다른 사람의 생명이 자라기까지 미숙함이나,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본성으로 인한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사랑도 함께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서 교회가 가는 길에 함께 갈 것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성급히 고백을 내어 놓으라는 강제가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는 나의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처음 시작할 때 각자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고 자라기까지 각자가 가진 오물 같은 본성을 토해 놓을 때 처음엔 서로 그것으로 인하여 그렇게 갈등하면서도 생명의 법에 따라, 십자가의 도에 따라 다른 사람이 자기 생명으로 자라날 동안 내어 놓는 자기 의로움을 육신으로 감수해가는 복음의 참 모습은 점점 흐릿해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러하니 너도 그러하여야 한다는 주장과 강요 곧 복음이 율법이 되어가고 그것이 교회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그 즈음에 참 복음의 기억을 가진 이들과, 복음이 강요되는 것을 어려워한 이들이 그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렇게 본토 아비집과 같은 곳을 떠났다. 그리고 이 실패와 아픔을 다시 겪지 않는 교회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것은 내 안에 있는 이 복음을 알리는 것이었고, 그 나마 내 형편에서 감당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인터넷이고 블로그였다.
그렇게 이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3년 안에 자기 의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기 생명으로 고백하는 한 사람만 만나도 성공’한 것이라고 여기며 시작한지 이제 4년을 넘기고 있다. 그 사이 놀랍게도 하나님의 의를 고백하는 개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찾아오고 또 만나고, 이메일과 문자 등으로 복음을 나누는 이들이 나타났다. 3년에 한 명이 아니라 아주 많은 이들이......
그것은 놀라운 것이기도 했고, 이전의 두 번의 교회에서는 알 수 없는 놀라운 세계였다. 그리고 참 복음은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교회가 가는 길에 같이 갈 것이냐 말 것이냐 결정해라, 이것은 영적 전쟁이다.’는 것과 같은 강요나 주장이 없어도 복음이 가진 능력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진정 놀라운 세계였다.
그런 즈음부터 마음에 교회에 대한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교회를 이룰 것인지, 아니 이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교회가 될 것인지 궁금해졌다. 인생의 경륜이 있는 나이를 가진 분들, 그러면서도 지역적으로 다들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한계, 그래서 인터넷을 활용해보고자 해 보면 인터넷에 익숙지 않은 분들이기도 하고 자본도 없는 상황들...... 그런 모든 것들이 어떻게 교회가 될지 궁금해 했고, 내가 뭔가 할 수 있는데 놓친 것은 없는지, 아니 뭘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생각들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심령에 있는 본성이 막고 서 있었다. 교회는 나의 것이 아니기에 내가 할 것이 없다는 것, 이전 교회에서 그 좋은 복음을 가지고 복음을 강제하기에 사람들이 받은 고통을 목도한 기억들이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기도 한 나를 홍해 앞에 선 모세와 같이 서 있게만 했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것, 복음을 글로 전하는 것 외에 시간들이 소비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역시 내가 알고 있고, 내 속에 있는 생명의 본성이 알고 있었듯이 교회는 역시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교회다. 그렇다는 것은 나는 나의 할 일만 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루신다는 것이었다. 지난 주말 그 시작을 보았다. 한 사람 안에서 복음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름을 알겠다는 고백이 나오고, 그 고백을 듣는 사람이 자기 삶에서 복음이 뒷전에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복음의 능력을 찬양하는 기적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전해들은 이가 그 놀라움에 화답하는 연쇄적인 일들이 펼쳐졌다.
교회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선제적인 말도 한 적이 없었다. 내 안에 교회에 대한 그림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앞에 펼쳐지지 않았기에 말하지 않았다. 이전 교회에서는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예언적인 메시지가 많았고, 사람들은 그렇게 되려 했다. 물론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노력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그러면 그게 율법이 되는 것이기에 교회가 어떤 것인지 마음에는 있지만 단지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교회가 태동하고 있다.
‘정말로 이것이 참 복음이구나! 여기가 교회구나!’ 여겼던 교회가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보고 교회를 떠난 지 여러 해 교회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단지 기다리기만 한 세월 같았던 날들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날들로 전환되고 있다. 교회를 떠나 다시 교회로 가고 있음에 놀라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이신 생명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렇게 교회가 시작되니 나도 교회에 속하게 되어가고 있다. 이것이 참 교회임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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