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기계나 사물과는 달리 그 유전적인 본성을 가지고 스스로 생존하고 그 본성이 생명이 가진 육체로 자기 생명의 본성과 특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면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생명의 본성을 가지고 살게 되고 그 본성이 말씀이 육신이 되듯 그 육신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명을 가진 존재를 성경은 구원을 받고 거듭난 생명이라고 하고 그 생명의 본성과 정체성을 그리스도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그 뜻하신 본성이기에 그 본성을 가졌다는 것은 아버지의 본성을 가진 자를 아들이라고 하듯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명을 가진 존재는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야 하는데 때로 우리가 변질된 신앙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게 된다. 이는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에서부터 계시록의 7교회에까지 여러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다니는 교회나 또 신앙 공동체나 신앙인이 변하여 이단이나 타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이 보고 듣고 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목해야 할 차이가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생명의 세계라면 타락을 하려면 그 전에 먼저 생명을 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락한 모습이나 생명을 얻지 모습은 거의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에 경건한 신앙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살았다고 여기시는 것이 아니면 제 아무리 열심이고 경건하며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인데, 그것은 타락을 논하기 이전에 살았는지 죽었는지부터가 먼저 정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목적을 사회적 규범보다 더 경건하고 까다로운 종교적 행위규범의 실천이 보통 사람 이상의 기적이나 규범의 성취, 아니면 성경의 완벽한 이해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종교적 타락은 당연히 그것에 대한 계획된 길, 그리고 많은 사람들(수의 많음)이 정도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렇게 추구한 것들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것인지,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이 맞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윤리적 타락이나, 사회적 비리를 저지른 교회를 타락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사회규범보다 경건하고 엄격한 종교규범을 준수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 타락을 논하기 전에 성경을 엄격하고 경건한 행위규범으로 보는 것이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법에 합당한 가치관인지를 좌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가치관이 아니라면 이는 타락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유무, 곧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닌 상태에서 타락이라 여기는 길로 들어섰다면 그것은 종교적 타락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의와 비슷한 사회적 규범의 타락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흔히 뉴스에서 교회나 목사 혹은 장로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서 ‘교회가 타락했다.’ 혹은 ‘교회가 변질됐다.’고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그 기준이 종교인으로서 보다 엄격한 도덕적 준수와 경건함을 위배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이 진정한 변질인지의 판결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종교적 행동 규범을 준수하는 것인지에 종속된 문제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다시 신앙의 본질적 요소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타락이라는 것은 어떤 기준과 지향하는 것에서 이탈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신앙이 가진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따라 그 정의가 달라진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원래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타락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닌 것에서 여전히 아닌 세계에서 다른 것으로 변질되었다면 변질이 되었다는 것은 맞을지 몰라도 타락이라고 말하기엔 어렵다. 그것은 결혼도 한 적 없는 이혼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성경에 있는 말씀들을 잘 지켜내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사회가 가진 규범에 비하여 더 경건하고 엄격한 성경의 말씀들, 거기에다가 창조주 하나님이 명한 말씀이라는 경건함과 권위가 있고, 성경을 지켜내면 천국이라는 보상이,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형벌이 있는 이 규범을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그 세계를 생명의 말씀과 세계로 본다는 서두의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해 보자. 언뜻 성경은 성경에 명하신 각종 계명과 말씀들은 기계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생명을 가지고 자기 의지로 자기 행위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람을 향한 말씀이기에 성경의 말씀들은 행동을 어떻게 하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행위규범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은 결국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어떤 생명이 보여주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보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신 생명이 되라는 것이다. 그 생명으로 거듭난다면 그 생명은 성경에 기록된 본성을 가지고 행동하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이 끊임없이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의로워질 수도 없다고 하는데,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것이나, 결혼을 하지 않는 행위를 하거나, 금식을 해서 능력이나 간구하는 바를 얻으려 하거나, 성경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려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고 있다. 단지 행위로 지키는 기준이 구약인지 신약인지 나누어서 신약을 지키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인 것이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율법은 이제 지키지 않아도 되고 항상 기도하고 감사하라는 것은 지켜야 한다는 것과 같은 구분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지키는 것이 설사 성경이라고 해도 그것을 지키는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행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보시기 때문이다. 행위가 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생명의 본성을 가졌는지를 보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할지라도 그것이 그 속 심령에 그런 행동을 하는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에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살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왔는지, 아니면 성경을 지켜야 한다고 하니 그것을 지키고 있는지를 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속심령을 보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의 행위의 규범이 설사 성경이라고 해도 그것을 지켜낸다고 구원을 받거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세상 사람이라 말하는 사회인들의 규범보다 더 엄격한 성경의 규범을 지키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종교인이거나 성경을 지키려는 사람 아니면 자기 행위의 의의 품격이 성경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벗어나서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행위로 지탄을 받게 되는 것은 타락이 아니다. 결혼도 한 적이 없는데 불륜이 있을 수 없듯, 제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타락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뜻하신 대로 하나님을 믿은 적이 있어야 타락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렇다고 결혼하지 않으면 불륜이라 말하기 어렵다고 문란한 성생활이 용인되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을 행위 규범으로 믿는 사람들이 타락이 없다고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라고 주신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니, 이는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공기놀이하는 꼴보다 더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신앙이 타락했는지를 논해보고 있다. 단지 타락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상태가 있었어야 한다.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보고, 성경을 지켜서 자기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 성공을 얻으려는 자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는 타락이라는 말조차 사치라는 것이다. 타락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도 뭐 그럴만한 것이 있었어야 이야기 거리라도 된다는 것이다.
다음 편에서 <생명 이후의 변질 혹은 타락>을 이야기 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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