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12-30) 고난도 받는 은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빌립보서 Date : 2017. 7. 17. 11: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 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보기에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이는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인 문제도 그렇습니다. 누구나 좋고 만족할 수 있는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고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아닙니다. 현상적으로 보면 이상과 현실의 차이지만 이것은 좀 다른 문제입니다.


신앙의 문제로 들어와서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사람들은 우선 자기 육신의 삶이나 생활에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신앙적인 부정함으로 봅니다. 건강이 악화되거나 사업에 어려움을 만나면 우선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했는지(Do)에 대하여 돌아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험한 일 만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 역시 궤를 같이 하는 일입니다. 험한 일을 만난다는 것은 자신이 부정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사고와 가치관 속에는 우리가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준>입니다. 어떤 것을 선하게 보고 어떤 것을 부정하고 악한 것으로 보는지에 대한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의하여 분류된 부정한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Do)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고 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기준에 의하여 선한 것으로 분류된 일을 추구하고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때로는 그것에 방해되는 것을 마귀의 시험이라고 하고,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삶에도 침범해서 자신이 가진 기준으로 부정한 것을 다른 이의 삶에서 제거하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자기 안에 있는 기준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사람들 사회의 모든 갈등과 다툼과 전쟁은 이 기준에서 비롯됩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이라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나고 자란 정체성과 환경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남녀의 문제가 그렇고, 이념의 문제가 그렇고 종교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관철되어야 선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가치 기준을 <선악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벌거벗고 있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는데, 자기 기준으로 보니 자신의 정체성이 부끄럽고 숨길 것이 많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 육신의 정체성과 능력이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대로 만드시고 만족하신 이 육신을 가진 삶마저도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보니 부끄럽고 감추어야 하고, 끝없는 노력으로 갱신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자기 기준에 선한 것을 추구하게 합니다. 부정하고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안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이 생각하는 부정한 일, 자기 육신이 불편을 느끼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바라는 것입니다. 말과 생각만 있으면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 다른 나라를 왕래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육신이 불편해지고 소비되지 않는 기적이 일어날 때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옥에 갇힌 것과 같은 상황은 그 가치관으로 볼 때 하나님께 영광된 것이나, 복음의 진보는커녕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즉 고난은 없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신이 옥에 갇힌 것은 복음의 진보이며, 그리스도의 은혜는 고난도 받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고난, 즉 사람들이 겪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 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로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연단하시는 일이겠지!’라고 여길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는 것이 은혜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은 육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소비되는 것이기에 그 소비의 한 모습으로 고난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은혜는 자신 스스로는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육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안다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알고 보니 육신은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 곧 육신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일에 사용되기 위한 것이더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면서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며, 옥에 갇히는 것과 같이 부정한 일이 복음의 진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 뇌까리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또한 이렇게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서 사람들의 생각에 고난과 부정한 일을 겪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그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선악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즉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의 삶이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에 부정한 짐승이 탄 것이나,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보내시며 보이신 환상이 그렇고 무엇보다 부정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부정한 일은 인생에서 죄악으로 간주해서 쳐 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이 있을 때 온전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죄사함을 받은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는데 다른 사람의 부정함을 용납할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없이 다른 사람의 부정함을 용납하는 것은 천국의 상급에 목적이 있거나, 아니면 성결대로 해야 자신이 부정한 일을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하는 것뿐입니다.


고난은 은혜로운 것이며, 부정한 것을 용납하고 고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자기 안에 사람과 세상을 보는 자신의 의로움에서 비롯된 기준이 없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만이 고난에 참여하는 하는 것이 은혜로운 것이라는 것을 아는 유일한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구원이 없듯,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하나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표현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셨듯이, 육신의 수고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부정한 일과 고난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소비되고 곤고한 것도 다 우리가 스스로 알지 못했던 우리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함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고난이 은혜로운 것을 아는 유일한 방향인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Philippians 1: 12-30) The grace of suffering


I hope that not only a person who believes in God but everyone is good at what he sees. This is a social problem, not just an individual problem. Everyone dreams and pursues a world without discrimination that can be good and satisfying. But no one can live that way. This is not the difference between ideal and reality. It's a different phenomenon, but it's a different matter.


It becomes clearer when we come into the matter of faith. First of all, people see religious incongruity as an unfavorable thing in life or in life. If your health deteriorates or your business becomes difficult, first look at what you did wrong with God (Do). Many people pray to God to pray that they will not meet any difficult thing. To meet a hard work is to be a person who is unclean.


There is something in the minds and values ​​of such people that we can never overlook. There is a standard for what to look good, what to deny, and what to regard as evil. I pray that I will not see what is wrong with God when I see the unclean things classified by that standard, and that nothing will happen.


On the other hand, we strive to pursue and achieve what is classified as good by the standards. Sometimes it is called the temptation of the devil which is disturbed by it, and it also tries to get rid of the unclean thing in the life of another by invading the life of another person. All of this begins with the standards in you.


In fact, all conflicts, strife, and wars in the people's society come from these standards. Because it is not the same as the standard. Everyone is different. It depends on the identity and environment in which you are born and raised. It is the issue of men and women, the problem of ideology, and the problem of religion. It is good to do what you think is right.


The Bible tells us that the value standard of such people is "Good and Evil." It was not a shame that God was naked before the body of the good and evil was eaten, and by his own standards, his identity was ashamed and there was much to hide. That is, the identity and power of the flesh does not meet its own standards. Even a life with this flesh, which God made according to His intended purpose, was satisfied that man should be ashamed and hid by his own standards, and that he should be renewed in endless endeavor.


As I mentioned earlier, such a thought leads us to pursue what is good in our own standards. It is not possible that unfair and unfortunate things happen. That is why we pray to God that we do not want to see the uncleanness of ourselves and the inconvenience of our bodies. So I want a miracle. Just as words and thoughts are things that can go beyond the limits of the flesh and travel to other countries. The Spirit is working when the physical body becomes uncomfortable and a miracle that is not consumed occurs.


The situation in which the Apostle Paul was imprisoned was glorified by God in his values, but the apostle Paul did something wrong to God, rather than the progress of the gospel. In other words, if there is no hardship, God blesses you and regards you as glory to God. However, the apostle Paul tells us that he is imprisoned in the jail is the progress of the gospel, and the grace of Christ is suffering.


It is not a matter of comfort to think that suffering, the desire of people not to suffer, is gracious. It is not just to say, 'God is going to pavilion!' To be suffering is to be gracious, because the flesh is consumed to express God's will, so that suffering as a form of consumption knows that God has given us grace.


Grace is to know what you can not have on your own. It is grace that man knows the purpose and meaning of his physical life. Knowing that grace, the flesh is to know that it is to be used in the work of showing God's righteousness and will, the fleshly character of God, just like Jesus who gave the flesh to the cross. It is impossible to say that corruption is the progress of the gospel, as the suffering is the grace of God, and the imprisonment of jail, without knowing the providence of God. It is possible in the Bible to be able to call it the brain.


Also, knowing that we are living in the flesh and experiencing afflictions and unclean things in people's thoughts is life, and through that, God's righteousness is revealed, the problem of good and evil has been resolved. That is, the life of a person who has been forgiven of sins. Noah's ark had an unclean beast, but Jesus, who had been crucified, became a corrupt sinner and above all the illusion of sending Peter to Cornelius. It is the appearance of a person who has been forgiven of sin to know that the unclean thing in the world's values ​​is not to be regarded as sin in life but to be perfect and graceful when there is such a thing. I do not have that kind of mind, but there is no way I can tolerate the uncertainty of others. To tolerate the uncleanness of others without such a mind is to have a purpose in the reward of heaven, or to do it by conscience, and to think that it is not done by the unclean thing.


Trouble is gracious, and in order to tolerate uncleanness and to participate in suffering, there must be no standard that comes from the righteousness of man to see man and the world in himself. In other words, it is the only one knowing that it is gracious for only those who have solved the problem of good and evil to participate in suffering. Just as Jesus did not have salvation other than Jesus, just as Jesus showed the character of God by expressing his identity as the Son of God by giving the flesh to the cross, the unfaithfulness and suffering in terms of the labor of the flesh and the values ​​of the world, It is the only way to know that suffering is gracious, knowing that what is consumed and afflicted is also the grace of God that made us know the purpose of our lives and the meaning of life that we did not know for ourse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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