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조금만 다녔다면 ‘이 세상은 그림자’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림자라는 것은 본체가 있어야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 블로그에서는 <내용과 형식>이라고 표현했다. 이 세상과 사람과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목적이 있기에 그 목적을 나타낼 형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 곧 존재의 목적이 본질인 것이다.


이것을 알고 세상이 그림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가 본질이고 그것이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야고보서에서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고 하심은 하나님은 본체이심을 세상은 그 그림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히브리서기자와 배울 사도가 골로새서에서 율법을 그림자로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체가 있으면 율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블로그에서는 그리스도의 생명만 있으면 성경을 다 지키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블로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실 성경은 행동 강령이 아니다. 이는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행위나 소유>의 하나님 아니시기 때문이다. 신의 정체성이나 성격이 그 신앙의 근간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이름이 ‘여호와’고 그 뜻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름이 정체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자신을 믿는 존재의 행동이나 소유의 드림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이 전혀 없고, 오히려 ‘있다’라는 것이 그 정체성이신 분이다. 즉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행동 강령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에 기초한 신앙이나 공동체 역시 그 정체성이 존재적인 관점이어야 한다. 무엇을 하느냐가 쟁점이 아니라 ‘너는 누구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네가 어디(정체성)에 있느냐?’과 같은 것이 쟁점인 것이다. 그것을 기조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엇’에는 기도나 교리 문답이나 교회에 다니는 것과 같은 것도 포함된 것이다. 이것을 간과하는 교회나 신앙이 앞서 이야기 한 결혼도 하지 않은 큰 교회의 신앙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와 신앙의 타락과 변질에 있어서 근원적인 것은 그 존재의 정체성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교회가 어떤 짓을 했다거나, 목사가 어떤 추악한 짓을 했다는 것이 교회나 신앙의 타락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락은 정체성의 상실인 것이지, 그림자와 같은 형식이나 행동의 어떠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말씀 앞에 어리석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러면 그리스도의 정체성만 가지면(혹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도둑질을 해도 괜찮은가?’라는 반문을 한다. 이런 질문은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가장 어리석은 말 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그 말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 도둑질도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더욱이 목사나 대학교수로서 장로나 집사가 된 자와 같이 똑똑하다는 자가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그 가치관이 행위를 의로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그림자 이야기로 돌아와서 보면 이렇듯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그림자 곧 형식만 보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신약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행위 규범, 곧 율법적 신앙이 아닌 것으로 아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또 이 말을 듣고 ‘그럼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어리석음까지 설명하기엔 지면이 부족하다.) 이러한 문제는 그림자를 본질로 아는 것으로 여기는 어두움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맹인을 고치셨다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그림자를 본질로 보는 그 안목을 고치셨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는 것은 반대로 이 세상이 그림자인 것을 안다면 예수님을 만난 것이고,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림자라는 것을 알 것이며, 그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육신으로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본질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섣불리 보인다고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아마 신학 꽤나 만지작 그렸다는 것에 기대어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보인다면 우리 인생이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상태로 났다는 것이 인정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온전한 상태로 태어났다는 것이 인정된다는 것은 율법적인 신앙 관점, 그림자를 본질로 보는 어두운 안목으로 타락이라 규정한 것들이 재해석 될 것이고, 새롭게 보일 것이다. 이는 타락이 온전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타락이라는 것이 행위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정체성에서 기인된 것이며, 정체성이라는 것을 온전히 안다면 우리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이라는 것을 또한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그게 생명의 법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것은 행위의 부족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방에서 사용하는 칼은 그 정체성이 식재료를 다듬고 잘라서 요리하는데 사용하는 목적 하에 날카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정체성은 분명 요리하는데 사용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칼을 다루다 보면 손을 베이기도 하는데 그렇게 칼이 손에 살짝 베었다고 타락이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사람과 신앙과 삶과 교회에 대하여 아무렇지 않게 적용되고 이해되는 지경이 되어야 진정으로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본질을 벗어난 타락이 무엇인지, 그리고 온전함은 또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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