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는 목사가 있다. 사회적, 법률적 지위는 없지만 종교적으로 교회가 설립되려면 어쨌든 성경을 학문으로 공부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목사라고 하면 신앙적으로 지도자적 지위에 있다. 신부나 중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중은 내가 잘 아는 분야가 아니라 이 글의 대상은 아니다. 물론 종교라는 것 자체가 행위로 의롭게 되어 보겠다고 하는 측면에서 보면 목사나 중이나 신부다 다 같다.
그런데 우습게도 목사들은 자신들은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줄로 안다. 신부들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제대로 된 기만이다. 자신들이 목사가 된 과정이 이미 행위의 공로인데, 어떻게 자신들이 가르치는 성경과 설교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가? 뿌리부터 기만 위에 있다.
목사가 되는 과정은 사실 예사롭지 않다. 무엇보다 공부를 해야 한다. 그것도 목사가 되겠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적인 우위에 서야 한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미 이것이 공로고 행위다. 그리고 공부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최종 목표인 위임목사가 되기 위해서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위임목사가 되겠다고 이력서를 넣을 때는 그 시절 동안 어떤 공로가 있었는지 자랑한다. 논문을 뭘 썼으며, 공부는 어디서 했고, 어떤 위대한 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했으며, 하는 동안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기록해서 제출한다. 이것을 두고 행위와 공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뻔뻔함 그 자체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꼴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이 행위와 공로에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그들이 공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해서이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경을 공부하고 있으니 자신들이 행위와 공로에 매인 자들이 아니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나, 종교적 공로 역시 행위와 공로인 것은 분명한 것이다. 유대인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제사장들의 정체성이 그랬던 것처럼.
이렇듯 목사라는 신분은 그 태생이 공로와 행위의 기반 위에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목사가 되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라고 설교한다. 가증함 그 자체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이 딱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하는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기만은 사실 더 큰 문제가 있다. 자신의 태생과 정체성이 행위와 공로에 있다 보니 그들의 가치관 역시 행위의 거룩함과 공로의 크기가 의로움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것을 귀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가치관이 그러하다보니 교회가 가는 방향 또한 그렇다. 항상 큰 교회가 되려고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긴다. 큰 교회에 시무한다는 것 자체가 목회자로로서 성공했다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노아의 홍수를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마음의 죄를 보시고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하셨다. 그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아 위대한 자 곧 네피림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다는 자들이 세상이 성공으로 여기는 아름다움인 크고 웅장하고 질 좋고 사람이 많이 모이며 세상에서 성공한 이들이 많이 모여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위대한 교회를 건축하고 이루려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아 위대한 자를 낳아 하나님의 진노를 산 사건이다.
교회의 설립요건인 목사의 정체성이 바로 그런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라는 신분은 이미 목사가 되겠다는 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위대한 한 단계를 거치고, 다음으로 위임목사가 되었다는 것은 또 다른 종교적 위대함으로 이겨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위대함을 추구해오고 그것을 신앙으로 여기는 자들이니 소위 말하는 목회는 안 봐도 비디오인 것이다.
그러니 어떤가? 목사라는 신분이야 말로 교회 타락을 상징하는 존재가 아닌가?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오셨는데 목사는 경쟁자들을 이겨 높이 올랐고, 교회는 세상과의 경쟁에서 이겨 더 좋은 건물, 벽돌 하나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니 더 좋은 것으로 지어서 높아지고 위대해진 교회의 타락 그 중심에 목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낮춘다고 말하고 교인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또 한 단계 더 나아간 기만을 펼친다. 말을 순하고 겸손하게 한다고 사람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초등적 사고방식이다.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순하게 하고 상대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고 청소하고 헌신한다고 사람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목사이기 때문에, 교회를 위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다 엉망이 된다. 앞서 목사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했지 않는가? 그 행위와 공로의 위대함을 인정받고자 몸을 낮추었다면 그것은 투자고 목적을 위한 가식일 뿐 본연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또한 설교나 성경을 보는 관점도 맥을 같이 한다. 늘 하는 말이 ‘천국에 가려면~’,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하라고 말한다. 늘 To Do를 이야기 한다. 그나마 그런 조건은 좀 들어 줄만한데, 심지어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하는 사업이 잘 되고 건강하려면~’도 빠지지 않는다. 무당 굿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렇듯 목사라는 존재는 교회 타락의 본질적 뿌리이다.(사실 타락했다고 할 정도로 뭔가를 가진 적도 없지만) 물론 교회 타락이 목사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되고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기만하면서 육신의 복락을 추구하는 신앙이 근원된 타락이다. 문제는 사람들의 그 바람이 세운 우상이자 대명사가 바로 목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잘 알고자 한다면 목사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말로 인하여 예외가 발생하듯, 신앙이라는 것도 성경에 관해서, 종교적 행위와 공로에 대해서, 또 성경을 아는 것과 종교적 신분에 관해서 조차 낮아지지 않으면 낮아진 것이 아니다. 세상이 겸손하게 여기는 아름다움을 가져다가 신앙에 혼합하는 간음한 겸손과 같은 것으로 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타락에 있다. 하나님을 믿어 자기 하는 일을 잘 되게 하고자 하는 신앙이 그것이다. 오늘 당신이 기도한 내용을 돌아보라. 밥 달라, 돈 달라 기도하지 않았는지, 또는 전지전능하시고 실수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다스리는 세상이 잘 못되었으니 고쳐달라고 정의를 외치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이 도깨비 방망이나, 자신이 만든 세상이 잘못되는 것도 모르고 방치하시는 신이 아니다. 그것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사, 교회 타락의 상징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종교라는 세계에서 더 성공하고 경쟁력 있는 목사를 찾고, 그래서 목사들은 공부하고, 교회 목회의 공로를 내세운다. 이 모든 것이 한 뿌리에 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앙 침몰한 실체이다. 그리고 이것은 타락의 축에도 들지 못한다. 이런 꼴은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한 적 없는 사람과 같다. 그러니 이런 상태에서 세상의 지탄을 받는 지경이 되는 것은 타락이 아니라, 본성대로 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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