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의 예배시간에 듣는 설교는 행위의 도덕성에 대한 모범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는 설교거나, 크고 높고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초인간적 능력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성공에 있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센티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된 것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이나 좋은 신앙의 열매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교회도 분명히 있다. 물론 많지 않고, 어떤 부분에서는 기존의 교단으로부터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을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기에 대중적 보편성을 신앙의 정통성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다소 불안감을 주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인생을 걸어야 하는 일임을 아는 이들에게는 한 번은 검토해볼 수 있는 교회들도 있다. 이런 교회들은 진정한 생명의 세계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의 세계를 누리는 교회는 거대하기 어렵다. 거대해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 어렵다. 신천지나 순복음교회와 같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교회나 절에 가서 비는 모든 것은 결국 세상에서의 성공과, 원치 않는 일을 당치 않는 것인데, 그런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 생명의 세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서 몇 편의 글에서 이야기한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는 교회들의 타락은 타락이라기보다 그냥 하나님을 빙자하여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노력을 하는 노릇과 시늉을 하다가 변질된 것이기에 그런 것을 타락이나 변질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런 교회나 신앙은 타락이 아니라 원래부터 타락의 상태와 죄와 사망의 상태에 있었을 뿐이다. 단지 바리새인들과 같이 성경을 행위로 지켜보려고 종교적 계율을 자신들의 윤리규범으로 지키려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다 지치거나 버린 것뿐이다. 예수님께서 노릇이라고 한 것과 같이.
그러나 생명의 세계에는 타락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성경에서도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 성령을 훼방하는 자와 같이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로 나온다. 양심에 화인을 맞았다면 양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성령을 훼방하려면 성령의 정체를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양심과 성령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서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것을 알고도 버렸는데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이다.
생명을 알고서 타락하는 자들은 앞선 글에서 비유한 것으로 보면 결혼을 한 사람이다. 결혼한 상태에서의 불륜이나 부정이기에 이는 결혼에 대한 타락을 이야기한다. 반면에 결혼하지 않은 상태의 문란함은 성적인 문란이기는 하지만 간통이나 불륜은 해당되지 않는 것과 같다. 생명을 알지 못한 세계에서 율법을 지키는 노릇을 하는 자들이나 교회는 양심이나 성령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을 버리고 훼방하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생명을 알고 난 다음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러나 생명을 알고 그것을 나누는 교회는 일반적인 윤리 기준을 신앙의 근간으로 삼지 않는다. 이것은 영지주의처럼 외면하거나 포기하거나 무시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행위에 대한 윤리 기준이나 사회적 규범의 준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아는 이들에게는 생명으로 잉태된 사람이면 그 생명을 본성대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자연스레 지키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생명의 본성이 그리스도의 본성이니, 그리스도의 본성이 속에 있고, 그 본성으로 인한 행위가 나온다면 그것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 본성이기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악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의한 본성으로 사는데 그것이 악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때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이의 삶을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은 단지 그들이 하나님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곧 온전한 교회요 하나님 나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윤리적 문제에 대하여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본성만 있으면 그것에서 비롯된 모든 삶의 모습을 용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용납의 모습은 생명의 장성함에 따라 다르다. 어린 아이는 똥오줌을 가리지 못한다. 이는 길이나 방이나 어디서나 용변을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모가 일일이 수고하여 그것을 치우고 씻기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도 그 생명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수용하는 수고를 감당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교회에 안에서 봉사고 섬기는 것이고, 더 장성한 자가 어린 자를 인하여 육신을 수고하는 십자가를 진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생명의 모습을 가진 교회는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교회와는 전혀 다르다. 우선 교회의 생성부터 다르다. 위가 흔히 교회라고 하는 교회들은 교회의 설립 요건을 갖춘 다음에 건물을 빌리거나 건축하고서 사람들을 모은다. 그 설립 요건이라는 것이 신앙을 공부한 목사라는 라이센스가 중심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진정 생명이 있는 교회는 목사라는 라이센스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서 만나고, 그리고 모이면서부터 교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이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름은 정체성이니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모이면 그곳이 바로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생명은 자연 발생적이고, 속에 있는 본성에 이끌려서 사는 존재다. 기계는 밖에서 주는 명령에 의하여 움직인다. 방향이 반대다. 만들고 성장하는 것도 반대다. 생명은 먹기만 하면 속에서 밖으로 자란다. 반대로 기계나 제조물을 크게 하려면 밖에 덧붙이거나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이 중에서 가장 핵심적은 것은 인위적이지 않고 그 본성을 좇아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그 본성에 이끌려서 동일한 생명을 찾는 것 이외에 모이는 목적이 있을 수 없다. 사람도 그렇고 군집을 이루어 생활하는 모든 생명체가 혼자가 되면 자기와 동일한 생명을 찾는 것을 가장 먼저 한다. 그리고 동일한 생명을 찾는 목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동일한 생명을 찾아서 만나고 그 다음에 무리가 또 사회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타락을 논하려면 먼저 이런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회는 이렇지 않다. 먼저 목사나 전도사와 같이 신앙을 학문으로 공부하고 그 세계에서 경쟁을 해서 잘 구축된 교회에 선출되어 가거나, 아니면 자기의 역량과 자격을 바탕으로 교회를 먼저 세운다. 그리고 사람을 모은다. 앞서 생명과 기계를 비교했을 때 기계의 모습과 같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우리가 아는 교회의 상당수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렇듯 먼저 교회를 세우고 사람을 모으면 오는 사람들은 다 그 교회를 세운 사람의 정체성과 궤를 같이하는 목적을 가지고 온다. 교회를 세운 이들이 경쟁에서 이겨 높은 곳에 올라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자, 곧 목사다. 물론 그들이 경쟁하는 분야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세계다. 그래서 경건할 것 같지만, 이미 정체성이 온전하지 않다.
그렇게 교회를 세우고서 사람을 모으니 사람들도 다들 세상의 경쟁에서 하나님을 빌어 이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그들의 말로 타락했다하기 전에 세상을 이기고자 하는 분야가 윤리와 도덕 그리고 청렴과 같은 것이라서 경건한 줄로 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모두 간첩의 선행과 같다. 존재가 하나님께 적합하지 않은데, 그 존재의 정체성과 목적이 세상에서의 경쟁에서 이겨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고자 하는 존재들인데 그 행위가 성경을 다 지킨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다 자기들의 행위가 기준과 처음에서 점점 멀어져 보이면 타락했다고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의지로 자기 행위를 단속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나, 그런 타락은 반복적으로 이야기했듯 정체가 드러났고, 결혼도 한 적이 없는 이와 같이 타락을 논할 존재가 된 적도 없는 자들이기에 불륜이라 할 수 있는 타락을 논하는 것 마저 건방지고 교만한 것이다.
타락을 논하려면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한다. 불륜을 논하려면 결혼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결혼하지 않고 난잡한 성생활을 하는 것은 문란한 사생활일 뿐 불륜은 아니듯, 생명의 교회가 되어본 적도 없는 교회와 신앙은 세상이 지탄하는 짓거리를 한다고 타락이 아니라, 그냥 그들의 죄가 더 문란해진 것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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