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 즈음하여...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9. 1. 11. 10:20 Writer : 김홍덕

저는 이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김홍덕(집사)라고 합니다. 오늘은 이 블로그를 통하여 알게 된 분들, 그리고 기존의 교회와 다른 신앙생활을 기대하시는 분들의 마음에 있거나 기대하고 있는 <공동체>, 더 나아가서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어쩌면 좀 긴 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듯 이 블로그를 운영한지도 5, 6년이 넘었습니다. 블로그 통계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기준으로 보면 매일 평균 300번 이상의 방문 기록이 있고, 그 중에서 75%이상은 재방문인 블로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수치나 현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 블로그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가 개인에게 만족과 기쁨이 되신다고 연락을 주시는 분들이 계시고 그 분들의 상당수가 <공동체와 교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도 계시고 또 직접적으로 요구나 문의를 해 오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남>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블로그를 시작할 때 가진 방향은 <평신도들의 공동체>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도 늘 이것에 대한 생각을 끊이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많은 생각들 중에 초라할지라도 제가 거주하고 있는 대구에서 모임을 시작하고, 1월 21일 경에는 수도권 중에서 김포에서 모임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모임을 시작하는 즈음에> 생각도 정리하기도 하고 또 모임을 기대하시는 분들, 궁금해 하시는 분들에게 <평신도들의 공동체>의 모습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한 가지 먼저 밝힐 것은 이 글에서 전개되는 공동체의 모습은 하나님의 의를 나누는 공동체의 유일한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표현은 무한하기에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제가 설명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분명히 저의 신앙 여정과 삶의 경험이라는 색이 묻어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생각


우선은 공동체의 색깔이 어떠하더라도 하나님의 공동체라면 반드시 가진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과 세계에서 유일한 생명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스스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신 이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의로 삼는 공동체는 그 일원 중에 누가 제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한 개인의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 그리스도의 본성이 생명이 되어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삶이 새롭게 바뀌는 것과 궤를 같이 합니다. 늘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행실이 발라야지…’와 같이 말하는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기 때문인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예수만 믿으면 도둑질을 해도 되느냐?’고 묻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에 대하여 늘 설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도둑질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본성이 삶을 바꾼다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생명에 대하여 각 개인의 신앙에서 볼 때 그러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 역시 그 법에 따르는 것입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의당 그 구성원의 본성과 동일한 의를 가지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내 그 차이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온도 팽창계수가 다른 물질끼리 붙여 놓으면 온도라는 아주 자연스런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 분리되고 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고 공동체의 의가 되는 모임과 공동체 더 나아가서 교회(사실 같은 것이기도 함)는 한 개인 안에 들어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모습이 성령의 감동(잉태하심)으로 생명의 본성이 되고, 그것이 깃든 육신이 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이 생기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한 개인의 신앙에서 그 속에 그리스도의 본성만 있으며,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바뀌게 되고,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믿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기 안에 있는 의가 자기 삶을 이전과 다르게 이끌고 바꾸어가는 것을 스스로 보고서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 인함임을 알게 된 사람에게는 너무나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교회는 간절하지만 기다리는 것이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의 형성


온전한 교회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교회는 생소한 것입니다. 이전에 알지 못하던 세계로의 진입인 것입니다. 물론 이전에 자신이 가진 신앙이나, 다니던 교회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본토 아비 집을 떠나듯이 새로운 교회를 찾는 마음들은 대부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아니라고 떠나는 것과 ‘이것이구나!’라고 결정하는 것은 완연히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하나님의 온전한 공동체를 찾는 사람이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설계도를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가진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고, 그것을 가질 수도 없는 것이며, 행여 온전한 하나님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그가 가진 교회에 대한 설계도로 인하여 갈등과 분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동체는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것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잉태되어 본성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어린 아이가 엄마를 찾듯이 그 생명을 나누고 의지하며 보증하고 보증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찾게 되고 그렇게 만나는 그 만남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생명과 정체성)으로 모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생명을 가진 사람은 그 생명을 가진 공동체를 알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런 사람들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만 있으면 교회가 되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만나고 모이는 그것이 바로 공동체요 교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교회를 만들고 사람들을 모아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만 하시고, 아직 제자들조차 그리스도의 본성이 온전하지 않을 때에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약속만 남기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셔서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그것을 교회라고 이름하게 된 것입니다. 먼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 생명의 자람이 어느 정도인지는 무관한 것입니다. 아이가 나기만 하면 사람이지, 몇 살이 되어야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알게 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각한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는 사람을 만나야만 알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났다거나, 묵상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불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어도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기도를 듣고 하나님 아들이 되게 하시면 될 것이지 괜히 이 세상에서 와서 십자가에 못 박힐 것까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은 사람을 만남으로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얼굴과 얼굴로 대하는 것만을 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책이나 글 그리고 요즘과 같은 시대의 미디어와 인터넷 등 다양합니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으뜸은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이고, 같이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서로 대하면서 서로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일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절실함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의가 본성인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기에 육신을 가진 사람이 육신으로 표현(말과 삶)된 하나님의 의를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보고서 자기 마음 안에 이미지로 들어가게 되고, 그것이 성령의 감동 곧 잉태하심으로 생명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과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되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서 사도들로, 또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져서 오늘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 사이에 어떤 경우는 직접 만남으로, 또 어떤 때에는 보지는 않았지만 글이나 소식으로 듣고서도 하나님의 의가 전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지 않고 믿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이것인데, 육신을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를 알고 있고, 하나님께서 육신을 경영하시는 법을 믿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렀고, 저도 그것을 이 블로그에 기록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보면, 각 사람이 만나는 순간들, 함께하는 시간들, 또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으로 할 수 있는 말과 글, 노래나 영상이나 삶으로 표현한 것을 접하면서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모든 순간들에 예수님께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신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교회의 한 모습이라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되어


교회는 영어로 the Church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개념이 공동체라는 형태로 나타나서 a church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the Christ가 a christ가 되는 법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진 개성만큼 다양하게 그리스도의 성품이 표현되듯 교회도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한 표준적인 형태를 규정하고 그것에 맞추어 이단을 논하는 것은 그런 시도와 논의 자체가 근원적인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양성과 풍성함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a church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의를 가진 두 사람의 만남도 교회이고, 하나님의 의가 아직 없거나 미숙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가진 한 사람에게 그 의에 대하여 듣고자 하여 만나는 그 순간도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과 같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 모든 순간들이 다 a church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a church가 a apple들이 마켓에 한데 모여 있듯, 또 한 가지에 자라나듯 함께 있는 것이 공동체요 더 큰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작은 만남들,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들 혹은 그것을 알고자 만나고 그것을 나누는 모든 순간들이 다 a church이고, 그 순간들이 때로 큰 공동체 밖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마켓 안에 있는 사과나 밖에 있는 사과나 한 개인이 들고 있는 사과나 모두가 사과이듯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법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생명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알 수 없고, 육신으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사람이 사람을 만나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교회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그렇지 않다면 제 아무리 좋은 건물과 시스템과 부드러운 말과 도덕적인 양식과 눈물 나는 봉사가 있다고 해도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모임에 즈음하여


바로 이런 것이 교회라는 것이 제 안에 있기에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속적으로 블로그에 글을 올려왔고, 몇몇 분들을 만나서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생각에 이끌리어 사람들이 볼 때 전혀 교회 같지도 않고 초라하며,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교회법’과 같은 것과 전혀 상관없는 모양이며, 그렇게 중시하는 목사도 없이 모임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장밋빛도 아니고,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보증하는 공동체입니다. 말 그대로 앞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삶이 있기에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전하고자 살아가는 것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주장 앞에 죄인이 되어 육신으로 수고하는 삶을 살아가므로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자신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삶이 모여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본성인 온전한 공동체는 그런 사람들의 삶에 위로가 되고, 서로 모여서 떡을 떼는 곳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떡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낸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나누므로 그것을 듣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영광과 소망을 주는 것이 떡을 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에게 작용하는 것이며, 이는 그 생명의 장성함에 무관한 것입니다. 부모들이 말도 못하는 아이에게 위로 받는 것과 같은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때까지 이곳저곳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누기도 전하기도 해 온 것도 분명히 a church로서 분명하지만 말하자면 농사지은 것은 판매하는 작은 가게를 열듯이 시작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에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이 블로그를 시작할 때 있었던 생각이고, 하나님의 의가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궤도에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좇아 살다보면 맞이하는 과정의 하나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교회는 없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교회는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모읍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making)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재료가 필요합니다. 건물과 신학을 공부한 목사 그리고 교회법과 장로 등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의 정통성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을 수는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가 태어나는 생명의 과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 하나는 분명합니다. 즉 생명의 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재론의 여지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설명해온 것과는 그 방향이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건물에 체계적인 시스템과 좋은 Spec.의 목사를 모아 교회를 세운 것은 종교단체로서는 훌륭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생명의 법과 의의 법에서 보면 해로운 것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것에 의지하는 것은 이 블로그에 많이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육신에 대한 안목이 어두워 육신을 본질로 보고, 육신과 그 육신이 속한 세상에서의 가치를 좇고, 행여 그것을 벗어나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인한 것입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빌어 육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려하고, 교회를 세우는 자들은 그것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때로 가시적인 성과가 없어도 죽어서 천국에 가면 있을 것이라는 것으로 얼마든지 어음을 발행할 수 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정체성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먼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이야기해 온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나오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위하여, 교회 생활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생명의 공동체이기에 먼저 생명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교회를 세워 사람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의 본성과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전하신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이들이 나온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의 시작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만들거나 하기 위해서 교회나 공동체를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땅에 심긴 씨앗이 생명이 되어가듯,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전하는 것이 지속되는 한 언제라도 교회는 있을 수 있고, 개개의 a church와 그 속성의 큰 a church는 언제든지 생기고 또 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과가 천 년 전에도 누군가에게 섭취되었고, 지금도 먹어 없어지지만 항상 사과인 것과 같이 교회도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고 해도 교회의 정체성 the Church는 아무리 사람들이 사과를 먹어치워도 사과는 영원하듯 영원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색으로서


이 글의 도입부에서 ‘물론 이 글에서 전개되는 공동체의 모습은 하나님의 의를 나누는 공동체의 유일한 모습이 아니다.’고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생명은 유일하지만 그것이 a church로 표현되는 것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교회의 본질적인 본성이 없으면 다양성이라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의에 대한 온전한 본성만 있다면 교회는 아주 다양한 형태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닐 것 같지만 이 땅에는 하나님께서 의롭고 선하게 여기사는 교회가 많을 것입니다. 알려지지 않기도 하고, 알려져 있지만 이단이라고 치부되기도 하고, 또 몰라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인 만큼 아직 세상이 망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있다면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그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들의 삶이 있을 것이고, 그 삶으로 인한 만남들 곧 a church가 늘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인 논리입니다.


저도 그런 교회를 몇 알고 있고, 이전에 그런 교회를 다니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함께 했습니다. 그런 공동체는 제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교회를 세워서 사람을 모은 교회보다는 절대적 우위에 있습니다. 피라미드의 위에 위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가치로 볼 때 더 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생명이 아프고 시름하듯 할 수 있고, 병든 사과나 멍든 사과 같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사과의 세계에서 본다면 사과이기는 한 것이기에 사과도 아닌 것과는 비교의 대상조차도 아닌 것입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사과를 사과라고 우긴다면 몰라도.


그리고 저 또한 이 블로그에서 전하고 있는 내용들이 모두 사람을 만나서 깨닫고 사람을 보면서 확증한 것들입니다. 그 확증하는 사람 안에 저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올리는 글들의 근원이 기도원에서 소나무 뿌리 뽑을 기세로 기도하다 알게 되듯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듣고, 그 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하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의를 확인해오면서 확신하는 것입니다.


잠시 저의 이야기를 잠시 한다면, 저는 이 복음을 들었을 때에 그것이 그때까지 제 자신이 옳다는 것과 다르기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이해하기 위해 말씀을 되새기는 많은 날들에 잠도 자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되씹고 되씹었습니다. 그 세월이 대략 20여년입니다. 야곱이 바로 왕 앞에서 자기 년 수가 130이라 조상의 세월에는 미치지 못하나 험난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하였는데 야곱이 말한 조상은 고사하고 야곱의 세월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저라는 한 개인이 가진 역량으로서는 최선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제 안에 확신하는 바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는 그 무엇보다 분명하고 최고의 것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최고인 것은 아닙니다. 아마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을 낮춘 것도 아마 이 마음을 인함이었으리라 이 생명의 유전자가 설명한다 여깁니다. 그렇듯 제 안에 있는 것은 최고이지만 저는 최고가 아니며, 하나님의 의가 교회의 불변하는 유일한 것이지만 교회는 또 다양하듯 제 안에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교회, 그리고 공동체가 된다면 그 공동체는 단지 a church의 하나 그 이상은 아닐 것입니다.





그 색은?


저는 앞서 짧게 말씀드린 것과 같이 나름의 신앙 여정이 있었기에 오늘 형성된 저의 가치관은 그 영향 아래에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의 특성입니다. 그릇이라는 것은 옴폭하게 담을 수 있는 것이지만 용도와 만드는 과정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지만 그것이 표현되는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의 삶이 묻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봐도, 베드로는 그물을 던질 때에 예수님이 부르셨고, 요한은 거물을 꿰매고 있을 때에 불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거물을 던지듯 전도하러 다니고 3,000명을 회개시키는 삶을 살았고, 요한은 교회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전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권면하는 역할을 한 것에 봐도 교회나 각 사람의 신앙의 모습은 다 다양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풍성함과 다양함이기도 합니다.


이제 그런 배경을 가지고 봐 주신다면, 제 마음에 있는 교회의 모습 몇 가지를 설명 드리면서 이 긴 글을 마칠까 합니다.


이 블로그를 시작할 즈음에 존재론적인 신앙을 가진 형님 한 분이 제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홍덕 형제는 교회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나?”라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교회는 평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교회에 올 마음이 있어서 와서 앉아 있다면 그 순간만큼은 평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교회는 오는 것도 평안해야 하고, 있는 동안도 평안해야 하고, 돌아가서도 평안해야 하며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한다고 부담스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오고 싶으면 오고,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고, 눈치도 보이지 않으며, 교회에 온다면 적어도 그 시간에 다른 곳에 그 육신이 가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드린 것이기에 와서 무슨 짓을 하든 그 마음에 존중을 가지고 서로 대하여야 하며, 신앙의 정도가 어떠하든 심지어 예배에 방해가 되는 짓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도전만 아니라면 누구도 그 사람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그것이 제어하지 않으며, 또 교회에 와서 어떤 모습을 보였다고 해도 돌아간 다음에 욕하지 않기에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은 시험에 드는 것도 자기 안에 있는 가치관이나 의에 대한 주장으로 인함이듯, 교회에 와서 어떤 모습이라 하더라도 그 스스로가 인지하고 수용하며 돌이키고 고백하며 순종하기까지 강제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강제한다고 하여 되지도 않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교회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얼마든지 사람들이 보고서 자신을 반추할 수 있는 종 된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에 자신이 보고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행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인생에 대하여 맡은 청지기로서의 책임이 그 스스로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졌다면 상대가 가진 의로움이나 주장 앞에서 자기 육신을 드려 수고하고 종이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와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니,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다 저렇다 주장할 이유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3년이나 함께 계셨지만 ‘너 그러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고, 다만 제자들이 자기 생각에 따라 하나님 아들에 대하여 주장하려 할 때만 아님을 말씀하셨고, 제자가 아닌 사람들도 바리새인과 같이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 앞에서만 강하셨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사람을 번거롭게 하고 기피하게 하는 사람들의 모습 앞에서 안 된다고 하신 적이 없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그 모습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면 교회는 평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저의 생각이 공동체를 기다리는 저의 생각에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부터 복음을 전하다 보니 보시는 분과 만나는 분들이 거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지역적인 것, 세대적인 것, 인터넷이나 컴퓨터를 활용하는 정도, 교육이나 이전 신앙의 정도도 다 다르기 때문에 우선 오는 것에 대한 평안의 방안이 없어 고민이 늘 깊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다 마냥 그럴 수는 없고, ‘매 주(every week)’라는 기준을 고수하지 않더라도 제 육신이 이곳저곳을 가면 된다고 생각하여 우선 대구와 김포 통진(예정)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차일피일 걱정만 하고 미루기만 한 저의 생각도 반성하면서.




맺으며…


그래서 이제 모임을 시작하려 합니다. 솔직히 이것이 얼마가지 않아 흐지부지 될 수도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또 저는 이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제 생애 중에 교회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짓지 못한 것과 같을 수도 있고, 한 편으로 보면 잠깐 언급한 것과 같이 이미 온전한 교회들이 세상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지 또 하나의 다른 사과와 같이 살다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교회는 억지로 되는 것이나 만들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행여 이전에 함께 했던 사람들, 어쩌다 그들은 머물고 저는 진행하였기에 이별이 된 사람들이 머문 자리에서 머물러 있었음을 알고서 갈 자리를 찾을 때에 그 기대를 채울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으나 그 또한 억지로 되는 것을 아님을 알고서 시작해 봅니다.


어찌될지도 모르는 작은 모임을 시작하면서 너무 거창한 글을 쓴 것인지는 모르지만, 저게 시작하는 모임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교회는 어떻게 생기고, 교회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도 함께 말씀드릴 겸해서 상황에 비하여 비대하고 긴 글을 올려 봅니다. 물론 추후에 지속적으로 성경 말씀을 이야기함에 있어 교회에 대하여 더 상세히 올릴 계획입니다.


형편없지만 판을 펴 보았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오셔도 되고 한 번 왔다 안 오셔도 되고, 오셔서 관찰만 하겠다고 하시면 자리 안내 외에는 성함도 묻지 않을 것입니다. 구경만 하셔도 되고, 질문을 가장 기대하지만 논쟁도 좋습니다. 오고 싶을 때 오시면 됩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별도의 공지가 있을 때까지 대구에서는 모임이 지속될 것입니다. 저 혼자 앉아 있더라도. 다만 제 건물이 아니고 빌려서 하는 것이라 오시기 전에 공지 여부는 꼭 확인해 주십시오. 먼 길 오셔서 허탕이면 서로 난감할 수 있을 듯하니 말입니다.


끝으로 교회에 대한 소망을 가지신 분들에게 교회의 정체성에 대하여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오시지 않더라고 글 중에 있었듯, 본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계신 어느 곳에서라도 하나님의 의를 나누는 만남과 공동체를 열어 가시는 것도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것을 제가 알아야할 이유는 없으니 내키시는 대로 평안히 교회를 대하여 가시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는 모든 분들에게 평안의 안식처가 제공되기를 소망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