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무시하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나 명분이나 심지어 성경적 근거가 있어 보일지 모른다. 그들의 생각에 세상은 언제라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이겼다고 하셨으니 아마 목숨을 걸고 그것을 믿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 기도할 때나 간증할 때에 자신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를 일컬어 벌레만도 못했던 시절이라고 말들을 하기에 자신과 달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세상도 그렇게 여기는 생각과 말들도 많이 한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 또 더 온전하게 되는 것에 대한 법을 알지 못하기에 앞서 이야기해 온 것과 같이 세상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선을 베풀 듯 전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모습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을 대할 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더 온전하고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세상의 법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에 관한 생각이다. 사람들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할 때 그 이김은 다분히 세상에서의 성공에 관한 것이다. 세상은 사람들의 성공에 장애가 많고,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성공하려고 하는 것에 반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기에 그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성공을 도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하나님이 도우시기에 하나님이 이기시는 것 같지만, 그 성취가 바로 세상이라는 것, 그리고 그 성취를 위하여 자신이 드린 것은 성경을 지키는 행위라는 것, 그리고 그런 관계를 정리하면 나는 하나님께 성경을 지키고 성경대로 행하는 행위를 드리고 하나님은 그것에 값을 매겨 상으로 복과 성공을 주시는 구조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오르고 싶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하나님을 빙자하여 올라가고자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거래를 제안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벨탑>의 사건이다. 흙에 짚을 넣고 구워서 하늘에 이르려고 했다는 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그 자신을 단련하여 하늘에 오르고자 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법으로 세상을 이길 수는 없다. 행여 교회에 다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그게 더 문제다. 존재의 하나님께 행위로 거래하여 무엇을 성취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정체성을 버리고 공로와 행위를 의로 여기시는 신이 되었거나, 아니면 그 성공한 사람이 믿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잡신의 보답일 뿐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다고 하신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지금의 신앙인들이 가진 생각과 같이 하나님을 믿어서 세상의 가치관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혹은 더 크게 얻어내는 것에 관한 것과는 전혀 반대의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하신 것은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의 실패가 없는 완전한 실패가 곧 세상을 이긴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식의 도덕적 역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식적인 것이다. 어떤 세계에서 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세계에 반하는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죄인이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을 죄로 여기심을 안다면 세상에서 죄인이 되는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머리로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면서도 삶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좇아가는 것은 한 마디로 그 본성이 거듭난 본성이 아니거나 그 본성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 문제는 이 블로그에서 말하고 있는 큰 교회가 아니라 존재의 신앙을 가진 이들,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도 크게 실수하는 부분이다. 즉 생명을 생명답게 표현하지 못하는 삶의 대표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으로 거듭난 안목으로 세상이나, 큰 교회의 신앙을 보면 자신이 가진 안목과의 차이를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그것은 이내 교만이 되고, 세상에 대하여 스스로 우위에 선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심이 바로 이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생명의 안목으로 보면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어떻게 할 수 없음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일면 그것을 볼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이 더 나은 선택 혹은 변질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진정한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빠지는 큰 유혹이 바로 세상을 대하는 자신들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생명으로 안목으로 세상을 볼 때 그 새삼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모든 것이 어리석게 보이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생각과 달리 자기들이 가진 옳고 그름의 기준을 좇아 서로 이기려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이없기 그지없고, 한 편으로는 불과 얼마 전까지 그렇게 살던 자신이 그것에서 벗어난 상황에 감사와 영광과 거룩함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런 안목을 주는 생명의 본성은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시면서 보이신 하나님 아들의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즉 세상의 안목과 전혀 다른 안목을 자신이 가지게 된 근원은 오히려 자기 눈에 보이는 그 어리석음 앞에 종이 되고, 그 어리석음에 빠져서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알 수 있도록 육신으로 살아 내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아주 큰 관문과 같아서 쉽게 그 너머로 가지 못한다. 필자가 사랑했고 사랑하는 공동체 역시 이 관문을 넘지 못했다. 복음을 가졌으나 그 복음으로 세상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무시하고 오히려 복음을 가진 자신들의 삶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더 성공하고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라 여기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좋은 건물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교인들이 성공의 자리로 가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자리로 가는 것을 보았다.
이렇듯 우리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것에 대하여 크게 착각한다. 생명이 없고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교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회로서 신학을 전공한 직업 목사가 설교하는 그런 교회는 세상의 성공을 위하여 하나님의 힘을 빌어 세상을 이기려 하는 어두움 중에 헤매면서도 자신들의 정통성을 신봉하는 망상에 빠져 있다.
반면에 많지 않은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공동체는 또 자신들이 얻은 생명의 근원이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 자신들 눈에 한 없이 어리석게 보이는 그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를 자기 생명으로 순종하여 얻은 생명임을 잊고, 자신들이 세상을 밝히 보므로 세상을 무시하고 또 자신이 세상을 이긴 것으로 착각하는 변질에 많이 빠진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을 이기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세상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개독교로 비난 받고 있는 상황도 그렇고, 세상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경제적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 자신들의 신앙대로 살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다 형통할 것이라 여기다 결국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큰 곤란함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세상 권세자들에게 굴복하라고 한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세상의 가치관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세상에 진다는 것이다. 이기려 해도 지고, 스스로 자신을 내어 주어 지는 자리로 가도 지는 것이지만, 스스로 그 자리로 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좇아 가는 것이기에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자기가 가진 신앙과 생명이 하나님께로 왔으므로 세상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신앙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다 형통케 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닌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이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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