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보이신 구속, 곧 우리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에 보내시고 살게 하신 뜻이다. 이것을 알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권면한 이유는 그것을 보고 순종하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인생의 목적, 삶의 의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살게 하신 뜻을 보고 그것을 수용하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의 구속이 나의 것이 되며, 예수님의 구속이 나의 것이라는 것을 알면 나의 존재 정체성에 대하여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이 담대함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담대함이다.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라는 것을 확신할 때만 가능하다.
즉 자신은 죄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때만 의로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깨끗한 물건을 만질 때만 봐도 자신의 손이 깨끗하다고 확신하지 않으면 만지지 못하는데 자신이 죄 없다고 고백할 수 없으면서 하나님께 나아가겠다고 어떤 노력이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 착각이다.
지금 이 히브리서도 예수님을 구속에 대하여 들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제사가 필요 없는, 그러니까 죄 없고 온전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심을 믿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것은 선진들로 나타난 믿음의 모습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구속을 바라보고 믿고 나아가자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있어 사람들이 징계라고 여기는 일들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위로하고 있다. 징계는 원인이 있다.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알지 못하면 모든 징계의 원인은 자기 행동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면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돌아보는 것이 사람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행동을 보인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사람들이 징계라 여기는 일들은 사람의 행위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구속을 인하여 죄 없는 존재라는 확신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마주하는 징계와 같은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는 이유 만으로 스스로 죄 없다 하지 못하면서 교리나 신앙 관습에 입각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니다. 죄 있는 하나님 아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아들의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인데 어떻게 자신에게 닥친 곤고함이 자신이 하나님 아들임을 인하여 겪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외식이고 도둑질일 뿐이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징계에 관한 말씀을 시작하면서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지는 않았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징계는 죄와 싸우는 과정에서 겪는 일이라는 말씀이다.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평안하게 지내고 성공하고자 하는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인하여 겪는 고난은 징계가 아니라는 의미다. 즉 곤고함을 이기고 나면 하나님께서 더 큰 재물과 평안을 주실 것이라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듣는 위로의 프레임은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로 볼 때 이 징계는 사람이 죄 없는 자가 되기까지 과정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채찍질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원칙적으로 죄 없는 존재여야 한다. 죄라는 것이 자기 자리를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정한 자리가 죄라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이 정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장이 아니라 원칙이다. 모든 것은 창조자와 주관자가 정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모든 존재의 원칙이다.
그런데 그 자리를 떠나 있다면 창조주는 당연히 원래 자리로 이끌려고 한다. 그런데 이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하여 자기 자리를 벗어난 사람은 하나님이 정한 자리에서 떠난 자리를 자신이 선택했기에 그것에 머물려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원래 자리로 돌리려 하고 사람은 하나님이 정한 자리에서 떠난 자리를 고수하려 하니 저항이 생긴다. 여기에 곤고함과 채찍질이 생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아들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이기에 채찍질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아들이 되도록 창조하셨는데 사람이 그것을 떠난 죄 가운데 있으므로 진정한 아들인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 자리를 떠난 인생들에게 원래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십자가에 보이셨다. 그것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죄 없는 자리, 하나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 사람의 할 일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므로 그 자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경영은 채찍질과 같고 징계와 같다. 그리고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온전한 대제사장으로서 더 이상 속죄가 필요 없는 단번에 드리는 제사를 드렸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회복을 위한 자리로 믿고 가자고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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