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모두 어부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렀을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장면은 예수님께서 부르시니 마치 홀리듯이 따라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이 자기 하던 일을 두고 새로운 가치를 좇는다는 것은 실제 엄청난 일이다. 이것은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사는 일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을 수밖에 없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릴 성전에 가신 일이 있고,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자랐다는 말씀이 있다. 이미 유대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었음을 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나타사서 나를 따라오라하니 따라간 것이 아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동생 안드레의 인도에 끌려 예수님을 먼저 만나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의 전개로 바닷가에서 부르시기 이미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만난 적이 있었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고, 말씀을 들은 적도 있었고 자신들이 평소에 듣고 배운 것과 다른 말씀을 이미 듣고 있었다. 실제로 요한 안드레 빌립 상당수는 예수님 세례 요한의 제자였고 세례 요한이 직접 제자들을 예수님께 인도했다.( 1:40)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를 따라오라는 한마디에 따라 나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과연 옳은 것인지 심령에서 씨름하는 세월을 거쳤고, 결과 자기 삶을 던지기로 결정을 하였기에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오늘날 신앙인들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세례 문답에 정해진 답을 인정하는 것으로 가볍고 쉽게 구원을 받아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전하신 말씀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자신도 십자가를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부름에 따라 나서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마가복음 후반에 나오는 소경 바디매오가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예수님이 부르시니 옷을 버려 두고 뛰어 것과 같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겉옷은 신분이자 재산이었던 것은 차치하고 소경이 뛰어가는 정도의 대단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서는 것이다.

 

어부의 전재산인 배와 거물을 버려 두고 따라 나선 제자나 앞이 보이지 않는데 예수님이 부르시니 뛰어나간 바디매오 같은 마음이 아니면 제자가 없다. 무엇보다 모든 재산과 자기 삶의 가치를 버리고 떠날 정도의 가치를 좇는 일이 순간 결정할 일은 아니다. 이것은 삶의 가치가 바뀌지 않고서 없는 일이다. 삶의 가치가 바뀌는 것은 거듭나야만 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서는 것은 이만한 갈등의 과정을 거쳐야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옵션을 하나 추가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인생을 거는 일이다. 어부의 배를 버리고 따라가는 일이며, 보이지 않는 소경이 뛰어갈 정도로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제자로 나서기 , 자신이 가졌던 모든 가치 기준이 뒤집히는 일이며, 이전과 전혀 다른 본성으로 사는 일이다. 그것을 알고 제자가 되려 해야 하고,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긴다면 인생을 걸고 따라가는 것이 제자의 길이다. 십자가를 져야 함을 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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