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장모의 열병과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일과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 사이에 예수님께서 전도하러 가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일이 복음을 전하는 것의 일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 되는 것이 육신의 병을 회복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과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한시라도 잊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육신의 건강과 복락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 하시고 제자들을 만났다. 그때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가까운 마을로 가서 전도하시면서 “내가 이를 위해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앞서 가버나움 회당과 같이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귀신을 내어 쫓았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내어 쫓을 때 사람들은 ‘새 교훈’이라 했고, 전도하러 가자고 하신 예수님은 회당에서 귀신을 내어 쫓았다. 그러니까 전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떠나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전도하시는 예수님의 일에서 우리는 전도에 대한 온전한 개념을 배울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전도는 교회에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다. 이 저변에는 교회가 사람을 구원한다는 믿음과 신뢰가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말하는 구원이 과연 예수님이 전하신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계속 회당에서 귀신을 내어 쫓으신다는 것이다. 회당은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당이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귀신 들린 자가 들어왔었다. 처음 들어 온 것이었다면 바디메오를 막듯 소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늘 드나들던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고, 예수님의 전도 여행에서도 회당에 귀신 들린 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씀들은 오늘날 교회가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교회가 가진 구원은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다. 그것이 복음의 본질이고, 구원의 능력이자 법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가 말하는 구원은 육신의 곤고함과 어려움에서 사람을 구하는 것 그리고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전부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가하고 압박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뜻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을 이기는 것이 구원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이라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이 가하는 어리석음 앞에 육신을 내어주셨다. 그리고 그 십자가, 낮아진 십자가가 구원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가지고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것은 제대로 귀신 들린 것이다.
전도, 곧 전할 도는 바로 십자가의 도다. 십자가에 인생의 존재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할 형식 가진 존재로서의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로 드러난 곳이 십자가다. 그 십자가를 보았다면 낮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알면 성령께서 육신이 그 십자가로 갈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사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니까 전할 것은 십자가의 도고, 십자가의 도는 거듭난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 모습은 오늘날 교회가 추구하고 자랑하는 세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끌고 가는 세상 앞에 육신의 수고와 생명을 내어주는 모습이다. 그게 전도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엉터리, 아니 거짓되고 가증한 전도를 하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기적은 이 목적에 수렴한다. 그리고 오신 목적이 완벽히 집적된 곳이 십자가다. 낮고 낮은 십자가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정수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기적은 이 목적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예수님의 구원이나 도움을 바랄 것이 아니다. 당연히 낮아지는 것과 달리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된다고 전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복음,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이 도가 있어야 한다. 자기 안에 없는 걸 전하는 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삯꾼 목자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낮아지는 십자가가 아니라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는 도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삯꾼이다. 이름만 목사나 전도자일 뿐 삯꾼이며 속이는 자며 예수님의 십자가 본질과 다른 것을 전하니 적그리스도다.
예수님은 그 삶이 전도다. 공생애 동안의 말씀과 기적과 능력도 전도지만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전도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도 역시 그렇다. 우리가 세상의 주장 앞에 예수의 이름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수고와 삶을 내어 줄 때 그 모습이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전도다.
결국 전도는 자신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외치는 것, 교회에 안 가면 지옥 간다는 것과 같이 사람을 겁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낮아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이 모습이 인생의 목적임을 알게 하는 삶을 전하는 것이 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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