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자 바리새인들은 분노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이야기란 걸 알아들었기 때문에 분노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이익에 반한다는 걸 알았기에 분노했다.

 

그리고 사람들(백성들)도 예수님을 찾았다. 예수님을 만지기라도 하면 병이 나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런 일로 인해 예수님은 피하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다. 또 한 부류,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봤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이나 백성들은 물론 귀신까지 예수님을 알았다. 하지만 다들 목적은 달랐고, 목적이 다른 만큼 대응도 달랐다.

 

이렇듯 많은 부류가 다른 모양으로 예수님을 인식했지만 정작 어느 것도 예수님이 원하시는 인식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피하시고, 자신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사람이 바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천하실 때는 땅끝까지 전하라고 하셨다. 그 사이에 성령강림이 있다.

 

사실 예수님의 정체성, 정확히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부활하신 이후까지 사람들에게 정립되지 않았다. 심지어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기 몸에 손대는 것을 금하시면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심도 같은 이유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요한복음 21장의 장면 속의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바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오셨지 사람이 기대하는 그리스도가 되려고 오신 게 아니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인생이 가진 문제를 크고 높고 강한 능력으로 해결하는 존재로 믿는다. 사람은 낮은 위치에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 예수님은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다. 사람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그리스도일 뿐 아니라 세상에 없는 그리스도, 구원자, 메시아, 영웅이다. 바리새인과 병 낫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그리스도가 바로 이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이런 그리스도를 전하러 오신 분이 아니다. 낮아지는 그리스도며, 네가 옳다고 말하고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그리스도다. 예수님이 전하시려 한 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성령이 오시므로 사람이 알게 된다. 이건 제자들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올바르게 정립되지 않았던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그런나 예수님이 있으실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대부분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높은 존재고, 사람 이상의 능력으로 사람을 강권하면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와 반대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께 적용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이 있으실 때 바리새인, 백성들은 물론 귀신들이 알았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사람이 가진 이 그릇된 그리스도에 대한 정의와 믿음을 바꾸기 위해선 말씀이 된 육신이 깨어지므로 그 속에 있던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을 보여주실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다.

 

오늘도 최소한의 문명이 전달된 사람이라면 예수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안다고 구원받을 순 없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하고 신앙을 배척하는 반응의 뿌리에는 모든 사람의 생각 속 그리스도는 초인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일반인과 다른 없는 모습을 보일 때 심한 비난을 한다. 기독교인들조차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기에 벌어진 일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주장에 끌려 십자가를 지신, 초인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임을 안다면 욕할 일도 없고, 욕먹을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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