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막 4:24)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기적도 행하고 놀라운 말씀을 선포했다는 사실만으로 예수님을 빛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심령 안에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있어 줄탁동시처럼 연결될 때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밝아지고 진정한 빛이 된다. 한 마디로 나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예수님으로 인한 밝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빛이란 걸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심도 궤를 같이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예수님과 연결된 사람, 그래서 온전히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 심령에 예수님과 같은 본성이 있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어렵지 않고 밝히 이해될 수밖에 없으니 예수님이 빛이 된다. 결국 빛이 드러난 사람과 귀 있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예수님께선 지금 무엇을 듣고 있는지 스스로 삼가라고 말씀하신다. 되새김질하는 짐승만 먹으라고 하심 같이 말씀을 묵상하란 의미다. 말씀을 듣고 자기 안에서 밝아질 때까지 묵상하고 또 묵상하란 말씀이다. 그렇게 하면 이어지는 자고 깨는 중에 말씀이 심령에서 자란다는 비유 그대로 심령에서 말씀이 자라고 밝아진다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헤아리고 측정하고 묵상하면 들은 이상으로 더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수가성 여인에게 하신 네 속에서 생수가 흘러넘칠 것이라 하신 말씀같이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면 말씀이 더 풍성해진다는 의미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그나마 들은 것마저 다 잃게 될 것이라 하신다. 길가에 뿌려진 씨가 새에게 먹히듯, 돌밭에서 난 싹이 햇볕에 마르듯, 또 가시의 방해로 자라지 못한다는 말씀이 그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묵상한다는 건 결국 좋은 밭이 되기 위해 심령을 개간하는 것과 같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 17:11,12)

 

더 받을 것이라 하신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과연 그런가?’ 끊임없이 묵상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된다는 건 말씀하신 하나님과 같은 의가 자기 안에 있다는 증거다. 따라서 말씀이 이해되기까지 묵상하는 과정은 심령에 심긴 말씀이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가 본성인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그 거듭남이 예수님을 온전한 빛임을 깨닫게 한다.

 

사람들의 생각처럼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음을 믿습니까?”란 질문에 라고 대답하는 그 간편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최소한 자기가 받은 구원이 무엇인지는 명확해야 한다. 받았다는 데 명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는 건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자리로 구원을 받았다는 건지, 죄는 무엇이며 구원이 죄를 깨끗이 씻는다면 일상에서 죄 없는 사람으로 산다는 건 또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자기 안에 있어야 구원받은 것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는 건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자리로 구원을 받았다는 건지, 죄는 무엇이며 구원이 죄를 깨끗이 씻는다면 일상에서 죄 없는 사람으로 산다는 건 또 무엇인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 혹은 의문에 대해 묵상함으로 밝아짐이 없는데 구원이 있을 수는 없다. 이건 성경이나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논리의 문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묵상하라고 하신 이유다. 그렇게 묵상할 때 묵상한 내용대로 구원받은 사람, 예수님의 빛이 밝게 비췬 사람으로 대우받는다. 우리의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는다는 의미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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