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26-29) 묵상이 필요한 이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6. 19. 16:16 Writer : 김홍덕

묵상이란 언뜻 보기에 천국에 상급을 쌓는 것이라는 기도, 봉사, 전도와 달리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다. 그래서 묵상만으로 어떻게 신앙이 자랄까 의심한다.(사실 이 정도 의문이 든다면 신앙에 대해 상당한 고찰이 있는 사람이다. 대부분은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신앙이 삶의 옵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땅에 심긴 씨가 모르는 사이 싹이 나고 열매가 되듯이 묵상함으로 신앙 열매가 열린다고 말씀하신다. 땅에 심긴 씨가 열매가 되는 자연의 법칙으로 비유하셨다는 건 신앙이 자라는 것 역시 묵상만으로 풍성하게 되는 게 불변의 법칙이란 뜻이다.

 

예수님께서 계속 농부와 씨 그리고 열매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열매를 맺는 건 생명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이다. 그래서 <거듭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나고 장성하여 열매 맺는 건 사람이 알고 있는 생명의 법, 그대로다.

 

생명은 유전자와 본성이 있다.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다. 사람이 어떤 재주를 부려도 사과를 심어 놓고 복숭아가 열리게 할 수는 없다. 그건 역설적으로 생명은 자기 본성대로 자란다. 하나님 말씀은 사람의 심령 안에서 되새김질하듯 묵상하므로 자란다. 그게 말씀의 본성이다.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동물만 먹으라고 하신 뜻도 여기 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의 말씀도 이 본성을 바탕으로 말씀하시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신앙이 자라기 위해서 자꾸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대표적인 게 기도다. 예수님께선 단 하나의 기도만 가르쳐 주셨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 말씀의 본성에 순종하고 수용하라는 게 전부다. 사람의 생각처럼 육신의 문제를 구하거나 신앙의 자람을 구하는 게 기도가 아니다. 기도 역시 하나님 말씀이 그 본성과 정체성대로 나를 주관하시도록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신앙 성장은 사람이 알고 있는 기도로 되는 게 아니다.

 

사실 하나님 말씀은 사람이 금방 수용하기 힘들다. 하나님 말씀이 어렵거나 별나서 그런 게 아니라 항상 높아지는 걸 추구하는 사람에게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란 말씀은 반대기 때문에 낯설고 수용하기 어렵다. 그래서 묵상이 필요하다.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가?’,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제자들과 사도들은 어떤 과정을 겪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 묵상 없이 말씀이 단번에 자기 게 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 하나님 말씀을 듣기 전까지 추구했던 삶의 방향과 하나님 말씀의 방향은 반대다.

 

항상 높아지는 걸 추구하는 사람에게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란 말씀이 만났는데 “왜 그런가?” 묵상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여기엔 충돌이 발생한다. 낮아지는 것과 높아지려는 게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여기 있다. 땅인 사람에게 떨어진 육신이 된 말씀은 씨와 같이 죽으므로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씨가 열매가 되려면 땅에 떨어져 섞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리고 예수님께선 십자가를 진다는 말에 깊은 혼돈에 빠진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곧 배신하고 떠나고 부활한 자신을 만난 다음에도 도망갈 제자들이 자신을 영화롭게 하였다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들 안에 심긴 하나님 말씀의 생명 본성, 그 능력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 자신이 그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시니 확실하게 아셨다.

 

예수님께선 제자들에게 생명이 풍성해지기 위해 무언가를 하라고 하신 적이 없다. 정말로 기도하라고도 하신 적 없다. 오히려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셨다.(변화산 아래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 말씀이 놀라운 생명이 된다는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다. 그 예수님께서 생명이 풍성해지려면 필요한 건 묵상이라고 하고 계신 것이다.

 

듣고 있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헤아리고 묵상하라는 게 예수님의 당부다. 그러면 말씀이 심령 안에서 생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심령에서 생명이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들린 말씀은 이미 십자가에서 썩었고 죽었다. 그 말씀이 생명이 되기까지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급하다. 아니 예수님 말씀을 귓등으로 듣는다. 그래서 자꾸 뭔가를 하려 한다. 봉사하고 외치고 노력한다. 더 안타까운 건 그 노력과 외침이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이미 전해진 하나님 말씀은 십자가에서 썩었다는 것을 믿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묵상해야 할 말씀은 넘친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 전 우리가 추구했던 것, 진리로 알고 주장하고 외쳤던 것들과 말씀을 비교해 본다면 욥의 세월에 버금가는 묵상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린 하나님 말씀과 반대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기에 이 말씀이 심령에서 생명이 될 때 감동은 평생의 감동이 되고, 생명이 되면 성경대로 살지 않으려 해도 다신 그럴 수 없는 자신이 된 걸 너무 밝히 알 것이다. 빛을 만나는 게 어떤 건지 너무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이게 단 하나의 구원, 그것이다. 그리고 자고 깨는 중에 열리는 열매, 풍성한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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