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신령한 것에 대한 말씀을 이어간다. 오늘날도 신령한 것에 대한 사람의 관심은 높다. 경계하면서도 성령의 은사, 기적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높다. 무엇보다 자기 삶에 그런 기적이 필요한 순간들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사람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 본질에서부터 다르다.
무엇보다 다른 건 성령의 정체성이다. 사람은 성령을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영으로 생각한다. 그 말이 틀린 것 아니지만 기적의 본질이 다르다. 성령은 사람의 생각처럼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일을 일으키는 능력을 일으키는 게 본업인 영이 아니다.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성령의 능력은 바로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필요하면 태양도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이지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게 본성인 영이 아니시다.
앞서 바울 사도는 성찬에 대해 말씀하면서 자기를 돌아보라고 했고, 그건 자신이 그리스도 거듭난 사람인지를 돌아보라는 말씀임을 설명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고서 탈이 나지 않으려면(죄가 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령한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은사를 말씀하신다. 성령에 대해 바로 알아볼 시간이다.
앞서 성찬에서 합당하지 않게 성찬에 임하는 건 주의 몸과 피에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심과 같은 맥락으로 성령으로 말하는 자는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무엇보다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을 주라 할 수 없다고 분명히 한다. 여기서 주목할 건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이란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천한 사형수로 실패한 예수, 그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지 세상에서 이긴 자거나 이긴 자가 되게 돕는 예수가 아니다.
즉 세상 기준, 세상 지혜로 볼 때 분명히 실패인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실패자가 아니라 나의 구주로 부른다는 건 성령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가장 근원된 능력이고 신령 능력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주라 부르는 예수는 세상에서 자신을 이기게 도와주는 주님이고, 세상의 실패와 세상 기준에서 낮은 처지의 자신을 구원할 주님이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아니다. 이걸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주로 부르는 건 한국사람이 일본 수상을 국가원수로 대하는 것과 같다.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패배자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육신의 성공과 평안을 달라고 하는 것 이상의 조롱도 없다. 이 모두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으로 난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자기 육신의 영화를 구할 수 없다. 이건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아는 마음이다. 마음에 천불이 나도 자식을 이길 수 없는 부모처럼 눈에 보이는 게 아무리 많고 급해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로 여기고 부를 수 없다는 걸 안다.
이게 바로 신령한 일이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은데 마음이 그렇게 이끌리고, 오히려 성경대로 살려고 애쓴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자신을 느낄 때 그 신령함을 맛본다. 바울 사도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령함이 바로 이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것, 이렇게 거듭나게 하는 것, 이것이 성령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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