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47)

베드로의 설교에 양심이 찔린 사람들은 어찌할지를 물었고,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3,00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초대교회가 사람 사회 속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 어떻게 시작하는지를 설명한다.

 

3,000명의 회개, 그리고 교회의 시작

 

우리가 알고 있고 길에서 볼 수 있는 교회는 일반적으로 먼저 목사 라이선스를 가진 사람이 건물을 임대하고 사람을 모으는 걸로 시작한다. 이런 시작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 사도행전 교회의 시작과는 명백히 다르다. 시작이 다르다는 건 미세한 차이가 아니다. 천로역정에서 담 넘어 순례를 시작한 사람을 생각하면 된다. 결국 그는 순례를 다 마치지 못했다.

 

잠깐 부연하자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내재한 생명의 본성이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도하고, 봉사하고, 착한 말씨로 살아가면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생각한다. 행동이 자기 정체성을 하나님 아들로 바꾼다고 믿고 있다. 명백히 방향이 반대다.

 

교회의 시작도 마찬가지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내재한 그리스도의 본성이 삶으로 나타나는 게 하나님 말씀의 방향성인 만큼 교회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모이는 게 먼저다. 그리고 건물이 필요해지면 그때 그 용도만을 위해 마련하면 족하다. 이런 교회가 이 시대 기독교의 로망인 초대교회의 본질이다. 건물이 있어야 교회가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만남 자체가 곧 교회다.

 

또 하나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초대교회에 관한 말씀이 있다. 바로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소유와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라는 말씀이다. 어쩌면 낭설처럼 이 말씀이 공산주의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말씀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교회가 어떤 사람이 어떻게 모인 곳인지를 먼저 생각하고서 이 말씀을 봐야 한다. 그저 교회는, 또는 하나님을 믿으려면 자기 물건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방향도 그게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니 그렇다는 것이지, 이렇게 살아야 교회다워지는 게 아니다.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면 마치 공산주의 사회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정체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건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 곧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표현하시겠다는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즉 자기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자기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삶이 된 사람은 모든 게 하나님의 말씀에 수렴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항상', '범사'와 같은 빈도 부사를 충족시키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같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렇게 사는 생명체가 되는 것뿐이다. 현재 기독교인들이 하듯이 노력으로는 어렵다.

 

모든 걸 통용한다는 건 모인 사람 모두가 자기 인생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

 

모든 물건을 통용한다는 건 내 것, 네 것 없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그저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데 자기의 모든 걸 사용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자기가 가진 물건을 모두 하나의 목적에 사용하는 것, 이것이 모든 걸 통용하는 것이다. 마치 자동차 공장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모두가 가진 걸 가지고 자동차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것과 같다. 자기 삶의 모든 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데 쓰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들의 삶을 통틀어 모두가 모든 걸 주를 위해 통용하는 것이다.

 

소유와 재산을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눈다는 말씀 역시 같은 맥락이다. 부자가 가진 재산으로 가난한 자의 필요를 돕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필요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의 필요다. 누군가 그런 삶으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필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의 어려움을 돕는 필요다. 무작정 재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역을 위해서, 또 그런 사람의 형편을 돕기 위한 필요다. 노숙자에게 밥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것을 한정하는 게 아니다.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는 필요는 사람이 거듭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을 돕는 데 필요한 필요를 말한다.

 

그렇다면 떡을 떼고 교제에 힘쓴다는 말씀도 여기에 귀속된다. 떡은 거듭난 영혼의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의 믿음을 보증하고 위로하는 말씀과 간증이고, 교제는 그것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을 나눔으로 서로가 자기 삶이 하나님께 영광됨을 보증받고, 위로받으며, 그 삶에 더욱 힘쓰게 되는 것이다. 이건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만족스럽지 못한 교회 생활에 '좋은 말씀과 교회가 없을까?' 방황하는 사람이 쉽게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모든 건 결국 교회가 무엇으로 시작하고, 무엇을 함께하는 공동체인가에서 결정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육신의 삶의 축복을 공유하고자 하는 교회라면 먼저 건물을 구하고 사람을 모아 노숙자에게 밥 지어주는 걸 재산을 나누어 주는 걸로 알고 그렇게 교회를 운영할 것이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의 만남이 교회의 시작이란 걸 알면 그리스도의 생명 본성으로 사는 삶의 모습이 모든 걸 통용하고, 주를 위한 필요를 위해 자기 가진 걸 내어놓고, 거듭난 삶의 열매를 나누고 교제하는 교회인 걸 알 것이다. 이 차이가 교회에 대한 만족을 나누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차이를 만든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