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3:1-10)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성전에 들어가려는데 앉은뱅이가 구걸했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고쳐 걷기도 하고 뛸 수도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고, 어릴 적부터 노래로도 불렀던 기적의 사건이다. 아주 유명한 말씀인데 여기서 두 가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했을까?'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의 경계를 넘어선 앉은뱅이의 모습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나 걸으라 하고(행 3:6)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했는지다. 생계를 위해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바라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금과 은으로 대표되는 돈이다. 이런 그의 바람에 대해 금과 은이 아니라 내(베드로와 요한)가 가진 것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걷게 되는 것이다. 금과 은의 대척점에 나사렛 예수를 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금과 은의 대척점
유대인들에게 나사렛은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곳으로 낙인찍힌 곳이다. 선한 것에 나올 수 없다는 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인데, 이건 지명만 한정하는 게 아니다. 신분이나 학력이나 경력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설교를 해?"와 같은 것이다.
베드로가 가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것이다.
생각해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나사렛 출신이라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서, 세리와 죄인과 창녀와 먹고 마시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신성모독이라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런 예수를 지금 베드로는 금과 은의 대척점에 두고 그것이 내가 금과 은 대신에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앉은뱅이에게 말하고 있다.
이는 후에 완치된 앉은뱅이가 솔로몬 행각에 나타나자 놀란 백성들에게 한 베드로의 설교에 그대로 녹아 있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예수를 너희가 금과 은을 귀하게 여기는 기준으로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이를 회개하라고 외쳤다.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겠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게 하면 유쾌한(새로운) 날이 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라 전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세상의 가치 기준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을 믿는 믿음을 권면한다.
다음으로는 앉은뱅이의 위치 변화다.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다가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떤 변화를 전후로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는지가 핵심이다. 표면상으로는 베드로에게 임한 기적 같은 능력이지만, 실상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금과 은이 아니다. 베드로도 이 기이함에 주목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 주목하라고 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된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앉은뱅이가 성전에 들어가게 된 건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금과 은으로 된 게 아니다. 하나님의 선함이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한 나사렛에서 온 예수의 정체성을 얻었더니 성전 앞에서 더 들어가지 못하고 앉아 있어야만 했던 앉은뱅이가 성전 안으로 들어갈 뿐 아니라 걷고 뛰며 기쁨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앉은뱅이를 기준으로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상황임에 틀림이 없다. 다만 이 앉은뱅이와 우리 자신을 비교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성전에 들어가서 기뻐하며, 감사헌금을 드리는 이유와 이 앉은뱅이가 기뻐하는 이유를 비교하면 어떤지를 반추해 보자. 자녀가 입학이나 취직했다고 기뻐하며 감사헌금을 드리는 사람이 기뻐하는 이유가 앉은뱅이가 기뻐하게 된 이유와 같은지는 쉽게 비교가 될 것이다.
앉은뱅이는 걷지 못했다는 건 행함이 없는 믿음이었고, 성전으로 들어갈 힘과 능력이 없었다는 뜻이다. 앉은뱅이가 금과 은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구걸할 때는 성전에 들어갈 힘이 없었다. 그러나 선한 게 날 수 없다는 나사렛에서 온 예수의 정체성을 믿었더니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귀한 게 없을 때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나사렛 예수를 믿었더니 들어가게 되었다.
앉은뱅이가 성전 문턱을 넘을 수 있었던 건 나사렛 예수의 이름
앉은뱅이의 기뻐하는 모습은 우리가 성전에 들어가는 동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또 우리가 성전에서 어떤 이유로 기뻐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금과 은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라는 정체성, 그 하나를 믿는 믿음으로 기쁨이 있는 성전 문턱을 넘을 수 없었던 앉은뱅이 같은 신앙이 성전 문턱을 넘고, 그렇게 넘어선 성전은 기쁨이 되었다. 교회에 가서 세상이 귀하다는 걸 얻기 위해 기도하지 않아도, 또 헌금이 없어도 나사렛 예수라는 그 정체성 하나로 기뻐하는지를 반추해 볼 시간이다.
우리가 성전에서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 된다는 믿음이어야 한다.
나사렛은 사람의 기준이다. 선한 게 나올 수 없는 지경과 구분, 차별을 말한다. 죄인들의 소굴에서 하나님 아들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고, 신학이나 경건한 훈련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는 생각의 상징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다. 사람이 설정한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기준과 다른 그리스도다. 금과 은으로 그 귀함을 매길 수 없다.
금이나 은 같은 세상 가치로는 선한 게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는 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
우리는 그 나사렛 예수로 인해 성전에 들어가고, 성전에서 기뻐해야 한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믿어야 한다. 금과 은으로 대변되는 가치 없이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 있다는 믿음, 이것이 우리를 성전 미문에 주저앉게 만드는 가치관을 이기고 들어가 기뻐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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