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이유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는 건 어쩌면 너무 상투적이고 교리적인 표현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들리는 이유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접근이 내 죄를 사하기 위해 형벌을 당한 구세주로 생각할 뿐, 내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으나 혹시나 있을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가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는 the Christ가 아니라 a Christ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에 대해선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

 

따라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에 대해 상고해 볼 차례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고, 히브리어로 같은 의미의 말은 메시아다. 그 의미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성경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그리스도가 되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머리에 기름을 부은 건 상징적인 의식이다. 길 가던 사람에게 다짜고짜 기름을 부으면 그리스도가 되는 게 아니다. 기름 부음을 받을 자격이 있는 합당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을 때 유효하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역시 "내가 그리스도다" 혹은 "너는 지금부터 그리스도다"라고 선언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굳이 그런 선언이나 보증이 없어도 된다. 정말 필요한 건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걸 확신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에 대해서는 다른 여러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믿으려고 애쓰고, '혹시 아니면 어떻게 하지?' 같은 고민이 있는 믿음이 아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으로 부인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남자로 난 사람이 세상에서 배운 모든 것으로 자신을 여자라고 우겨도, 심지어 성전환 수술을 해도 그 유전자가 남자인 걸 바꿀 수 없는 지경과 같다. 자기가 거듭났다는 사실이 그 정도로 인식이 되어야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는가?

사람들은 거듭남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르거나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거듭난다는 건 생명과 유전자와 본성이 다른 존재로 다시 난다는 뜻인데 교회에서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라는 대답이면 된다고 믿는다. 돈을 내고 죄를 면죄받는 면죄부가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고 말하면서 같은 매커니즘을 따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일시불로 내지 않을 뿐 교회에 다니는 동안 할부로 내고 있다.

 

성경은 거듭남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말씀하신다. 게다가 이건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성경을 조금만 읽었다면 물은 말씀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일과 그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기적이라는 뜻이다. 유일신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과 하나가 되는 게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남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순종하는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되도록 성령께서 잉태케 하신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모양 그대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무엇보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중요한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하기에 보이신 본이고 표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는 게 바로 구원이다.

 

 

그리스도는 영이신 하나님의 신성인 말씀과 그 하나님의 성품과 의와 뜻을 표현하기 위한 형식으로 창조된 사람이 하나가 된 사람의 정체성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고,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사람이 그리스도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걸 논하기 전에 달리실 때부터 예수님을 이끈 건 그리스도라는 본능이다.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처럼 순순히 십자가를 지신 것도, 또 스스로 내려오지 못한 이유도 모두 그리스도의 본성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신성)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아니라 신이라서 참았다거나 심지어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도 십자가에 대한 바른 견해가 아니며,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이었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했다고 인성을 한정하여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바른 견해가 아니다. 이런 그릇된 견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건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본성과 성품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본성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 그리고 육신을 가진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한다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겠다는 사람 창조의 목적 그 자체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인데,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된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으로 표현하시겠다는 게 창조 목적의 본질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말씀이 육신이 된 이유, 되어야 하는 이유이자 우리의 존재 목적이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건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났을 때 우리 삶의 모습이고 우리 삶의 목적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십자가다. 그래서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다.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처럼 순순히 끌려가 십자가를 지고, 또 하나님의 아들인데 스스로 내려오지 못하는 그 모습 전부가 사람을 통해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함은 십자가를 지는 낮아지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려는 성품이기 때문

 

그러므로 예수님은 신이기에, 사명감 때문에, 우리와 같은 육신이라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게 아니라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표현하시려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는 순종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그 모습과 본성은 결국 우리를 위한 것, 우리가 되어야 하는 모습이다.

 

덧붙여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생명 본성이 우러나는 것이므로,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으로는 절대로 이를 수 없다. 성경이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지적이 바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신앙이다. 여기서 성경은 신약, 구약이 따로 없다. 성경의 어느 구절이라도 노력으로 대하면 그게 율법이고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할 것이면 굳이 생명의 표현인 <거듭남>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우리가 되어야 하는 생명인 그리스도는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다. 이 낮아지는 마음을 가진 본성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고자 한 하나님의 성품이다. 사람은 육신을 연약하다고 생각하지만, 낮아지는 마음을 표현할 존재가 바위를 쪼개는 바람 같은 정체성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이루기에 너무 적합하다.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낮은 마음은 노력이나 신념이 아니다. 본성이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이 낮아진다니 신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버지가 모든 면에서 더 능력이 있지만 아들을 이길 수 없고, 아들이 하자는 대로 한다. 사람 살리는 능력이 사라지거나 감추어서가 아니라, 낮아지는 본성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인데 사람들이 "그 꼴로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라 할 수 있느냐?"며 십자가에 못 박겠다고 하니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자, 우리 존재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이 마음을 표현하시려고 나를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것이다.

 

 

맺는 말

사람들은 예수님이 신이자 사람이라는 생각을 동의하고 싶으면서도 십자가에서 늘 막힌다. 이건 있으면 안 되는 일이다. 십자가는 구원의 열쇠인데 오히려 십자가가 구원을 이해하는 방해가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순순히 졌고 또 내려오지 못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예수님 신성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모습에 헛갈리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신성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말 속에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육신 안에서 새로운 생명 본성이 되어 삶으로 나타나는 게 바로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걸 이해하려면 그리스도의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인 육신이 하나가 된 존재고, 그리스도가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낮아지는 마음이다. 따라서 낮아지는 마음으로 지신 십자가는 예수님이 가진 신성과 인성,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난 실체이다. 가장 온전한 모습을 깨고 스스로 능력을 발휘해서 내려올 이유가 없다.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자기 안에 이것을 이해하는 말씀이 없는 것이고, 그건 구원이 없다는 증거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에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된 분이고, 하나님과 하나인 분이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정체성은 곧 우리가 되어야 하는 정체성이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의도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내용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자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을 가진 우리에게 구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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