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정확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데 익숙한 대로 '선악과'라고 하자)는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논제임에도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은 쟁점일 것이다. 무엇보다 선악과가 주는 가장 큰 의문은 이게 나의 원죄라는 것이다. 원죄, 그러니까 내가 존재하면서부터 죄라는 것인데, 이에 관해 내가 교회에서 들었던 답들의 주류는 '불순종'이 원죄라는 것이었다. 기억에 남는 설명 중 하나는 "죄는 Sin과 sins가 있다. Sin에서 sins가 비롯된다"라는 설명이었는데, 그 역시 결국은 <Sin = 불순종>에 수렴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가장 일반적인 선악과에 대한 접근은 불순종이다. 하지만 불순종은 명쾌한 답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지금의 삶에도 불순종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선악과로 대변되는 원죄가 불순종이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문제를 해결했다면 구원받은 사람들은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부모는 그렇다 치고, 최소한 성경에는 순종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선악과는 그렇게 접근해선 답이 없는 문제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선악과에 관한 보다 깊은 설명을 위해 먼저 먹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먹는다는 건 내 소유, 내 것, 나의 본성이나 유전자가 된다는 뜻이다. 이걸 잘 기억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가자. 그렇다면 이제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선과 악이 나의 것, 내 본성이 되었다는 의미라는 걸 알 것이다.
그리고서 선악과를 먹어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분해해 보자. 먹었다는 건 내게 되었다는 의미임을 고려하면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선과 악을 내가 먹어서 혹은 내 것이 되어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악해져서 벌을 받는 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선을 먹은 건 왜 같이 벌을 받는 건가? 불순종이라서? 불순종은 앞에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설명했으니, 답이 되지 않는다. 그럼, 왜?
불순종이 원죄라면 온전한 회개는 없는 것
사실 내가 궁금했던 건 따로 있었다. '하나님은 왜 굳이 선악과를 만들었을까?'라는 것이었는데, 이 의문은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은 사람(아담)이 먹을 거라는 걸 몰랐을까?', '왜 에덴동산 중앙에 버젓이 두면서 지키지 않았을까?', '왜 굳이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경고했을까? 지키지도 않으면서, 시험한 건가?'라는 의문들이다. 이게 의문스럽지 않나? 이게 억지인가?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겠다고 하면서 죄의 근원인 선악과와 관련해서 이렇게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많은데 괜찮을 수 있을까? 이걸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했는데 선악과로 인한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
이제 문제를 풀어가 보자. 비단 선악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의 모든 의문을 대하는 자세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성경을 어렵게 또 이상하게 여기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한데, 그 이유가 하나님이 수수께끼 내듯이 성경을 주셔서 그런가? 아니면 누가 성경을 잘 이해하는지 구분하기 위한 변별력 둔 건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만인을 위한 복음이다. 배우지 않아도, 신학이라는 사람이 만든 학문을 몰라도 알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주신 게 성경이다. 예수님은 또 뭐라 하셨는가? 이제 친구가 되었으니, 모든 것을 말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빛을 비추셨고, 예수님은 빛이다. 그 아래 어두움이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선악과에 관한 여러 의문은 선악과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성경을 보는 사람의 관점에 있는 것이다. 성경 자체가 의문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거나, 일부러 어렵고 의문스럽게 기록했다고 말하면, 만민을 위한 복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친구로 여기시기에 모든 것을 말씀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 전체를 탄핵하는 것이 된다. 성경이 의문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는 건 하나님께서 어렵게 말하거나 숨겨서가 아니라, 사람이 성경의 의도와 다른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다.
선악과는 불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선과 악에 관한 기준을 가지느냐의 문제
선악과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이제 선악과는 불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선과 악에 관한 기준을 가지느냐의 문제라는 걸 이해했기를 바란다. 앞서 언급했듯이 먹는다는 건 나와 하나가 된다는 뜻임을 생각하면,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내가 선과 악을 모두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선과 악을 함께 가지려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있다. 바로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졌다는 게 된다. 기준이 없다면 선과 악은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은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면 안 되는가? 그건 아니다. 다만 누가 정한 기준을 가지는지가 문제다. 하나님이 정한 기준을 가졌다면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로서 문제가 없겠지만,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선과 악을 판단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용납하시지 않는다. 이건 꼭 하나님만이 그러시는 게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물건이 설계대로 작동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작동하면 그걸 용납하겠는가?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내가 정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선악과에 관한 말씀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어 보인다. 로마서나 고린도후서에서 아담, 하와로부터 죄가 들어왔다는 원죄적 개념을 바울 사도가 설명하기도 했지만, 선악과라는 단어는 창세기에 나오는 게 거의 전부다. 그런데 알고 보면 예수님께서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말씀하신 게 있는데 바로 예수님을 찾아서 온 부자 청년과의 대화다. (막 10장, 눅 18장) 그리고 이건 선악과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예수님께 나아 온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여!"라고 불렀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라며 반문하셨다. 이를 두고 "그럼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의 뜻은 "너는 하나님이 정하지 않은 선과 악에 관한 기준을 가졌구나!"다.
여기서 크게 주목할 게 있는데, 바로 부자 청년의 다음 말이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사도들의 말씀들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말 중의 하나다. 그 이유는,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은 바로 <행위>에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What must I do ~" 이게 바로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이고, 복과 벌의 기준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언제나 "나는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 "행위로 구원을 얻거나 의로워질 수 없다", "나는 중심을 본다", "보이는 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다"라며 행위나 사람의 외모로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걸 끊임없이 그리고 간절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뜻 그리고 말씀과 달리 행위와 외모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사람은 모두 선악과를 먹은 사람
그런데 사람은 이 하나를 듣지 않는다. 이렇게 분명한 하나님의 기준을 주목하지 않고 다른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한다. 이런 사람, 사람의 이런 모습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다.
그렇다면 이제 아담이 먹은 선악과가 왜 나의 원죄인지를 알 것이다. 오히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죄가 내게 유전된 게 아니라, 내 모습을 아담이 설명하고 대변하고 있다. '붉다'라는 의미의 아담이라는 단어는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 곧 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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