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투철한 신앙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단호하고 삶의 모든 것에 대하여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단호한 결별이나 심판을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주 중요한 신앙이고 아주 필요한 상황이 될 수 있다. 장로이신 아버지는 625를 겪은 세대기 때문에 가끔 "예수 믿는다고 하면 죽일 것이고,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는 협박 앞에서 죽어도 시인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큰 아들이 그런 협박 앞에서 자신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면서 페북에 올린 적이 있었다. 나는 "아들, 무슨 소리야, 일단 살고 봐야지"라고 시작하는 답글을 달았었다.
우리나라는 현재 나름 치안과 안보가 어느 정도 보장된 상태라서 그런 협박이 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신앙에 대한 결단과 같은 단호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나도 조금은 그런 사람으로 산 적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결국은 "너도 나와 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성경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지시고 보여주신 삶을 표현하는 하나의 표현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시면서 그 십자가를 보고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세계를 보여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과 같은 인격과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사람들을 삶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너도 나처럼">될 수 있게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고 전도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신앙의 단호함은 마구 휘두를 수 있는 칼은 아니다. 즉 아무 때나 단호함이 최고의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짐승 같은 인생'이란 것은 스스로 하는 고백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대한 단호함이 교회 안에서 높임을 받는 것은 분명한 치우침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니까 <너도 나처럼> 되게하는 것에 있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너는 짐승과 같은 존재니 상종을 말자">라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있어야 한다.
물론 단호함을 보이는 입장에서는 '이것도 다 사랑'이라고 여기기도 하지만 사랑은 결국 당사자가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랑은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도 사랑으로 여겨질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짐승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벌레만도 못하다는 신앙 고백을 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시 22:6)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간과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하는 신앙 고백이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판결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자신은 하나님을 믿고 있고, 또 어떤 경우는 제대로 된 복음을 알고 있는 것에 반해, 안 믿는 사람이나, 또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 등을 일컬어서 짐승이나, 또한 그 보다 못한 존재라고 폄하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의로움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세상에서 기독교인이 배척을 받는 결과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이 그것이다.
이러한 배타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한다. 그렇다는 것은 <너도 나처럼>의 기회가 박탈 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결론적으로 본다면 그렇다 해도 믿지 않은 사람에게 신앙적인 책임은 있겠지만, 먼저 믿는 사람의 본분이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일원으로서 본분을 다하지 않는 것은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는 근거는 단 하나, 자신은 예수를 믿고 있고 상대는 그렇지 않다는 점 그것 하나 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세상의 기준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인가는 근원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역설적으로 신앙 없는 사람을 세상에 속한 구원 받지 못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기독교인들도 세상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도 엄연히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그 육신이 속한 세상의 삶을 부인해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 다름아닌 <영지주의>인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을 보고 죄인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이지만, 기독교인들이 과연 세상의 일원으로서 세상의 법과 원칙을 잘 준수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는다는 그 하나의 이유 만으로 세상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의의 기준인 법이나 도덕 같은 것을 전혀 지키지 않으면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자신이 세상에서도 의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그렇다면 세상에서 자기 몫을 다하지 못함으로서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한때는 교회에 너무 시간을 많이 투자하느라 삶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엄청 힘든 시기를 오랫동안 보낸 것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신앙 생활 하느라 삶이 피폐해졌는지, 아니면 내가 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구분이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었다.
그때, 세상에서 성실히 수고하여 그 결과를 누리는 사람들을 향한 내 마음에는 <너는 돈 있냐?, 나는 예수 있다!>는 투철한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더 알아 가게 되면서, 신앙은 신앙이고, 인간으로서 가진 시간과 육신의 투자 여력을 교회에 사용하면서 삶을 돌보지 못하여 발생한 곤고함은 전적으로 내가 책임지고 감수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정상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육신으로 사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세상에서 루저로 인식되는 것을 교회에 가져와서 영적 전쟁의 전리품으로 내어 놓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냥 그것은 자신이 부족했다고 교회나 사회에서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자신은 하나님을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하여 살다 보니 세상에서 쳐지는 삶을 살게 되었는데, 그것을 나무라는 세상 사람들 특히나 가족이나 친구들을 하나님을 모르는 짐승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세상을 무시하는 것은 십자가를 모르는 것
모든 것을 떠나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그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기준은 어떻게 알겠는가? 그들에게는 그저 세상적 가치관 그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기독교인을 바라 볼 뿐인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렇게 보는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은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가치관으로 볼 때 완전한 악이었지만, 그들은 그것 밖에 알지 못하므로 그들의 가치관과 법에 의하여 자신이 죄인이 되고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세상적 가치관을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오히려 그들을 짐승이라며 무시하는 것은 도무지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을 봐야 하는 이유는 하나 뿐, <너도 나처럼>을 위해
세상 사람들을 보고 예수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심지어 가족과 부모를 무시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들을 교회로 또한 신앙 안으로 끌어 오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오만에 불과하다.
그리고 정녕 사람을 이끌어 오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배타적인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다. 만약에 나의 신앙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도전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설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이라면 나 역시 대상이 누구라도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협박 앞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할 때, 그 상황이 내 신앙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을 시험하는 것이라면 목숨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내 신앙의 의지를 보려 하는 것이라면 살아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을 가진 인생인데, 내 의지는 한계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체성을 무시하기 위한 협박이라면 은혜를 구하고 목숨은 버려야 한다고 답했었다.
즉 사람이 자신의 신앙의 단호함을 보이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것은 의지를 가진 행위적 신앙이고 가공된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찬양 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는 최대한 그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믿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 예수를 믿지 않고, 교회 생활하는 나에게 걸림이 된다고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은 자기 신앙을 자랑하는 것은 될지 몰라고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들 앞에서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 것이다"라고 하셨다.(요 13장) 그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볼 때, 참 저런 삶을 살고 싶은,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싶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예수 믿는다는 그 차이 하나고 무조건 사람을 무시하고 관계를 단절시켜가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이것이 오늘 날 기독교가 당면한 최대의 문제이고 현실이며, 세상에서 배척 받는 유일무이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를 잘못 믿고 있는 결과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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