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vs. 생명
세례가 물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 까지는 이해가 어렵지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물이라는 것이 세상의 지식과 명예와 부와 쾌락이라는 것으로 가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말을 우리의 육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공부를 한다는 것이 죽은 것인가?'와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공부든 돈을 모으는 것이든 심지어 쾌락도 다 살아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그것을 한다는 것이 물 속에 잠기는 것과 같이 죽을 곳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은 육신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성경이 말씀하는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이 목숨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도 목숨과 생명이 분명히 구분이 되어 있다.
목숨은 그야말로 육신의 생명, 곧 생물학적으로 살았는가 아닌가의 기준이 되는 관점으로 볼 때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다른 개념이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또한 의학적으로 살았는가 죽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존재 목적을 잘 나타내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다. 그러니까 시계는 시간을 가르키지 못하면 죽었다고 하고, 흔한 말로 '맛 갔다'고 한다. 이는 심지어 스포츠 안에서도 흔히 이야기 하기도 하는 그런 개념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읽게 하신 목적이자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있으면 살았다고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그 목적을 벗어난 상태의 삶을 살면 목숨은 붙어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세례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세우신 하나님의 규례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을 이루려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학문과 부와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고 누리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고 삶의 목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세상의 것을 추구하고 이루는 것에 있다고 여기며 살다가 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죽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떠나는 깨달음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고백이 세례라는 것이다.
삶이 허무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생명이 없는 것
사람들은 평생을 살고서 나이가 들면서 허무함을 느낀다. 다시 말해서 갈증이 해갈되지 않았고 배 고프다는 것이다. 더 이상 육신의 힘으로 뭔가를 도모하지 못할 나이가 되어서 삶을 돌아 보면 그저 허무하다고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공수래 공수거>라고 하기도 한다.
사람이 사는 동안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순간 "죽겠다"하고 또 죽고 싶은 마음 드는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렇게 살아낸 삶의 끝에 그냥 <빈 손으로 왔으니 빈 손으로 간다>라고 한단 말인가! 그것이야 말로 인식 세계 안에서 더할 나위 없는 허무함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죽은 것이다. 그렇게 죽도록 연명하고 살아 낸 인생의 끝에 아무것도 없다니! 그럴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이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목적과 이유는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만든 어떤 기계도 만든 목적이 있어서 엄청난 열을 내고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는 것이다. 하물며 그렇게 목적을 가지고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다고 깨닫는 것이 바로 세례인 것이다. 그리고 세례를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고백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이전의 방식 안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것, 세상을 좇아 살 수 없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열심하 수고한 결과를 신께 또한 세상에 바쳐서 그 소산을 얻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사람이 수고한 결과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 또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세상에서 수고한 결과물인 박사 학위나 돈과 명예를 들고 가서 하니님께서 주셔서 감사하다고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그저 하나님께 갈 때, 인간이라는 정체성 그것 하나만 가지고 가면 된다.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인간이라는 정체성만 드리는 것
하나님께 인간이라는 정체성 하나만 가지고 간다는 것에는 신앙도 필요없다. 그러니까 신앙생활 잘했다는 성과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그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고, 연약한 인간이며, 선악을 판단하던 존재였으며 스스로를 구원하거나 스스로 존재 목적을 알 수 없는 존재였다는 고백 그것이다.
그런 고백이 바로 세례의 고백이다. 그런 고백이 바로 홍수와 같은 세상의 모든 것, 그리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 또한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명예와 부귀와 쾌락으로는 나의 정체성을 알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전에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려 했으나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세상에 빠져서는 죽을 것 같다고 고백하는 것이고, 그렇게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의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로서 행위와 소유를 드리려 했던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볼 때 죽은 것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죽은 것이다. 천지를 만드시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수고를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세상에서 수고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이폰을 스티브 잡스에게 갤럭시S를 이건희 회장에게 선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주셨지, 세상의 소산을 다시 가져오라고 사람에게 명하시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산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 아래서 보면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이고 그것이 홍수와 같은 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고, 나의 갈급함을 채울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물 속에서 살 수 없음을 깨닫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례요, 홍수가 나에게 의미가 있어지고 노아 홍수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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