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으므로 아들의 배필을 구하고자 하였다. 남자에게 여자와 하나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의가 육신이 된 이삭에게 배필을 구한다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는 이에게 어떤 형식을 배필로 삼을 것인지에 대한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가진 이들이 어떤 삶의 모양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여인을 아들의 배필로 삼지 말고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아들의 배필, 곧 아들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이어갈 배필을 이방의 여자 중에서 취하지 말고, 고향의 여자 중에서 취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의 고향 땅은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한 땅이다. 그곳은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그 지방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함을 좇는 사람들)의 땅, 곧 그런 사람 중에서 아들의 배필을 얻겠다는 것이다. 이는 언뜻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떠나라고 할 때는 언제고, 또 그곳에 가서 아내를 취하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일은 이삭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야곱 역시 그 아내들을 가나안이 아닌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얻게 되기도 한다.
먼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브라함이 그 종에게 한 언약의 내용이다. 그것은 두 가지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여자가 그 땅을 떠나오려 하지 않으면 아브라함과 종의 언약이 무효가 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절대로 아들 이삭을 아브라함이 떠난 고향으로 데리고 가지는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을 아브라함이 떠난 고향에서 얻되, 반드시 그 땅을 떠나는 여자로 하여금 아들의 아내를 삼게 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한 사람의 신앙 여정이라고 한다면, 고향에서 살고 있는 여자라는 것은 신앙의 여정을 출발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자기 삶의 형식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목적이 하나님을 믿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신앙,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이 땅에서 위대해지고자 한 삶의 자리를 떠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생명으로 거듭났을 때에 그 생명을 표현해내는 삶의 방식을 기존에 가지고 있던 종교적인 관습,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는 것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문득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지만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아들의 배필을 구하러 보내는 종에게 환도 뼈에 손을 넣게 하고 맹세하게 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신앙의 여정을 가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살겠다는 사람들에게도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 믿기 시작하면 성격도 바꾸어야 하고 말투도 바꾸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직장도 버리고 예수를 같이 믿어주지 않으면 가족도 떠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결단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잘못된 관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자신의 것이 있다. 성격이 그렇고 외모가 그렇고 혈통(성씨)이 그렇고, 성별도 그렇다. 그러한 것은 다 고향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 중에 어떤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도 있고, 바꾸려 하고 원망스럽게 여기는 것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믿고, 또한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으로 안다면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선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염두에 보고 이 말씀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지만 반대로 아들의 아내를 반드시 그 땅에서 구하라고 하셨다는 것은 깊은 뜻이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라고 한 아브라함은 남자다. 즉 의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의(무엇이 가치 있는 것이고, 무엇이 선한 것인가 하는 가치관과 정체성)는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로 지어졌기에 사람의 육신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므로 그것은 다 온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의는 위대함을 좇는 것에서 떠나야 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생명의 배필, 그 생명을 표현하는 형식은 고향과 같이 원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것을 통하여 표현하라는 것이다. 다만 그 고향의 여인, 자기 삶에 주어진 육신과 같이 주어진 모든 형식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고향 땅에서 떠난 여자로 아들의 배필을 삼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형식의 본질을 모른 체 지키며 살다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알고 보니 그런 모든 것은 본질이 아니므로 아무렇지 않게 버리고 사는 것이 온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기도하는 것을 두고, 기도라는 것이 육신이 먹고 사는 것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이전에 기도하던 습관과 모양까지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무릎 꿇고 무엇을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고향 땅과 같이 위대함을 좇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기도하는 내용이 먹고 마시고 세상의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생명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고향 땅에서 아내를 얻으라는 것이다. 즉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의 어떠함들, 하나님께서 주신 성격이나 자신의 육신의 어떠함이나, 또한 그런 환경에서 몸에 베인 종교적인 습관들을 버리지 말고 그러한 것을 내용인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표현하는 배필인 형식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성격을 100%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가진 것 중에 어떤 것은 바꾸려 한다. 바꾸려 한다는 것은 잘못되었고 나쁘고 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성격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조성하실 때 주신 것이므로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성격 자체가 나쁜 것은 없다. 그것을 어디에 쓰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바벨탑을 쌓는데 사용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거하시게 자신의 본질로 여겨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사람으로 순종하느냐의 문제인 것과 같은 것이다.
칼의 날카로움이 위험하지만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의 문제다. 칼을 만들고 사는 이가 가진 목적 안에 있으면 그것은 선한 것이고,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으면 악한 것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떠난 고향과 같은 것,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삶의 어떠함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알기 전에 가지고 있고 훈련된 종교적인 관습과 같은 것들이 리브가가 그 고향 땅을 떠나듯이 위대함을 좇는 것에 사용되지 않고, 이삭의 아내가 되는 것, 즉 하나님 아들이 된 생명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고향 땅의 시로 자손을 삼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고, 이방인과 같이 자신에게 주신 것을 다 고치고 버릴 것으로 삼는 마음으로 삶의 모양을 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이삭의 아내를 이방인들 중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노아의 홍수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아 하나님을 격노케 한 일이 있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 즉 이삭의 아내를 아브라함의 고향 땅에서 얻는 것,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육신의 어떠함을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자기 삶의 표현 형식으로 삼으라는 것에 관하여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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