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말하는 남자와 여자는 의와 형식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었다.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라는 사람의 두 성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그것을 표현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을 설명하시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을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 연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삶의 본질이 되어 그 생명이 그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이 아내를 얻었다는 것은 이삭이 가진 생명을 표현해낼 아들을 얻을 형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아들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아들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만을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나타내시기 원하셨던 하나님의 의를 거쳐낸 다음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이 이삭인가 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여정으로 우리의 신앙 여정을 설명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아내를 얻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서 거듭난 생명을 표현해낼 삶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육신의 삶이 거듭난 생명을 가진 이후로는 마치 새롭게 아내를 얻어서 아들을 얻는 것과 같이, 거듭난 생명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삶을 살아서 다시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해 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삭이 아내를 얻는다는 그런 의미이다. 그렇다는 것은 거듭난 생명을 가지고서 다시 또 거듭난 생명을 얻는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얻는 아내와 같은 하나님 의의 형식인 육신의 삶은 이방인의 모양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거듭난 생명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육신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육신으로 주어진 삶의 모든 것을 어디에 사용하느냐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성격이나, 또한 환경, 그리고 그 환경으로 인하여 형성된 자아 정체성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꾸려 한다. 그것을 바꾸려 하는 사람이 바로 이방인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조성하신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실수함이 없으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어떠함을 비난하거나 부정하게 여기지 않으나, 하나님을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어떤 부분들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자기 하나님, 곧 이방신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이방인들 중에서 얻지도 말고, 또 본향을 떠나지 않는 여자도 아내로 삼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주신 육신의 삶의 모든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이방인과 같은 삶의 모양을 거듭난 생명이 살아가는 모양으로도 삼지 말고,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의로 여기며 그것으로 하나님께 도달해보려는 마음에서 떠나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을 다 거듭난 생명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을 아브라함의 고향 땅을 떠나는 여자로 아들의 아내로 삼으라고 하심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필자도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 말씀은 존재의 말씀이니 행동이야 어떻던 무슨 상관이냐며, 술 마시는 자리도 자청하면서 ‘사람 마시라고 만든 술, 사람이 마시는데 무슨 죄냐?’며 능동적으로 마시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모습을 보고서 누가 나와 같이 되고 싶어 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아들과 같이 내 안에 있는 거듭난 생명을 만나는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나쁜 것이 없다. 그렇다는 것은 신앙관이 바뀌었다고 버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관이 바뀌었으면 그 바뀐 신앙관으로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내가 위대해지려고 사용하던 하나님이 주신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나를 볼 때 성령의 감동이 있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던지심과 같이.
그리고 그와 같이 우리의 성격에서부터 가진 모든 것 까지 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우리의 삶을 볼 때 그것을 보는 이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깨달을 수 있도록 살아내는 것이 바로 우리 육신, 나의 삶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들이 아내를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전에 살던 삶을 단절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것이 교회 시대에 와서 <영지주의>로 나타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많은 신앙 공동체가 이런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서 밝아졌다고 막무가내로 종교적인 관습을 버리고,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세상을 심판하고 가족을 등지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든 신앙은 아들을 이방신과 결혼 시키는 것이나, 아니면 아들 이삭을 고향 땅으로 데리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은 떠나야 하는 것이다.
아들이 아내를 얻는다는 것은 거듭난 생명이 다시 아들을 얻을 수 있는 있는 삶의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비의 고향 땅과 같이 하나님께서 원래 나에게 주신 모든 것, 그것들로 아들을 얻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삶이어야 비로소 그 삶을 보는 이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고백이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을 얻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전도요 선교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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