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있는 에서의 본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21. 17:33 Writer : 김홍덕

이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 받은 아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아니면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고향 땅에서 불러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땅,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원하는 존재가 되게 하신 그 모든 의의 유일한 열매가 이삭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뜻하심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삭은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이르러서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는 사람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삭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런 이삭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주셨다고 하셨다. 아들을 얻을 수 없다면, 다른 여자를 취하면 될 것인데, 왜 하나님께 구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는 아들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이삭에 관한 말씀을 읽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시는 생명을 얻어낼 수 있으려면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맞게 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지전능하다고 하셔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뜻과 생명의 법을 넘어선 것을 구하는데 주시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능이 없으심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언약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야기함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에 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면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는 존재,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그의 그런 삶을 보고 다시 그런 사람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고, 또한 하나님은 그런 기도만 들으시는 분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서 유일한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을 받은 이삭에게서 난 아들들은 온전히 하나님의 의와 뜻을 나타내어야 하는데, 두 아들 모두 뭔가 허전한 점이 있다. 에서는 이방 여자와 결혼하여 그 부모의 근심을 사고, 쌍둥이 동생 야곱은 간사하여 형을 속여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는, 어떻게 보면 야비한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의 열매로 유일하게 인정하신 이삭의 아들들, 이삭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났는데 왜 그런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신앙 여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믿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자리로 가는 여정을 거친다. 애굽에서, 광야로,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이 그것을 설명하고, 선지자들에게서 세례 요한으로, 세례 요한에서 예수님으로의 여정이 그렇다. 


아브라함으로 본다면 갈대아 우르에서 애굽으로 그리고 헤브론으로 간 것이 그렇고, 그 이름이 ‘위대함의 아비’라는 정체성을 가진 자에서,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약속을 지켜내려 이스마엘을 낳는 사람으로, 그리고 할례를 받음으로 형식을 벗어버린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 때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들을 얻는 존재가 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나면 사람들은 쉽게 말해서 복음의 시대를 살게 된다. 율법의 신앙을 지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율법의 신앙이라는 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려는 신앙을 총칭하는 말이다. 구약성경, 신약성경의 문제가 아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려 하면 할례를 받지 못한 신앙이고, 광야의 신앙이고, 율법의 신앙이다.


그런 신앙에서 교회에서 예식으로서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 세례(방언을 받아야 한다는 멍청한 이야기가 아니다.)를 받고 복음의 여정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에서와 같은 본성이 자기 안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복음을 세상과 결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한 이삭의 몸에서 난 아들 에서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에서다.


사람들은 에서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 자신은 에서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좀 낫다면 에서와 같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에서와 같은 본성을 자신 안에서 고백해낼 수 없다면 이삭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즉 누구나 에서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알게 되면 세상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본성이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의 계시에 밝아진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신앙의 방향, 소위 말하는 이단이 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스마엘은 아주 세상적인 가치관이라면, 에서는 어떻게 보면 이단 같은 가치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본성은 복음을 깊이 알게 되면 한 번씩은 다 자기 안에서 그 본성이 표현된다는 것을 에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서와 같은 본성이 없다고 하면 이삭의 아들이 아니요, 에서와 같은 본성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이단이 되고,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이단이라고 하는 집단들은 기성교회 보다 성경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고(자세히 안다는 것이지 바로 안다는 것은 아니다.) 더 열심이다. 그런데 그들이 온전한 신앙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좋은 것을 세상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에서가 이방인 여자를 아내 곧 형식의 배필로 삼은 것과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세상적인 모습으로 복음을 표현한다는 것은 다양하다. 세상의 가치관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계급이다. 신앙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나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피라미드로 나타내는 것이다. 생명은 그렇게 피라미드식으로 등급을 매기는 것이 아니다. 교주가 있고, 반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을 기준으로 공동체 안에서 권력이 생겼다면 다 이단이고 에서의 본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은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골로새서에서 바울 사도는 세상의 헛된 철학과 속임수가 교회에서 인정받는 것을 책망했다. 철학이나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무력한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인데 에바브라가 세상의 철학이 부족하다고 외면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에 세상의 철학이라는 것에 얼마나 능통한지를 기준으로 옷을 다르게 입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서가 이방 여자와 결혼한 것이다.


미가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타락이 사마리아가 아니냐고 하셨다. 사마리아는 혈통이 섞인 사람들이다. 이방신과 서로 결혼한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다. 즉 복음을 세상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세상적인 것을 복음으로 표현하고 혼용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타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에서가 버림받은 이유이다.


복음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상적인 방법인 정치적 권력이나 군사력이나 완력으로 나타내셨는가?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심은 십자가의 법으로 하셨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죄인의 방법이고, 사형을 집행하는 틀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건축자가 버린 돌이요, 외면한 것 같으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이다.


복음은 언제 복음다워야 한다. 십자가의 도가 피라미드와 같이 등급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런데, 그런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에서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았듯, 복음을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나타내려 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복음에 대하여 밝을수록 더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에서와 같은 본성은 누구나 있다. 신앙의 여정을 가다 보면 잉태되는 아이가 내 맘대로 되지 않듯, 하나님의 복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에 세상적인 것으로 표현하려 한다. 그러면 그 때 그런 본성이 자신 안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길로 빠져들지 않을 것이고, 이삭의 아들이라는 것인 증거를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에서의 본성을 복음의 본질로,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으면 나락으로 빠져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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