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생각은 무한하다. 그 생각은 형식이 필요 없다. 그렇지만 생각대로 하려면 언제나 자신의 육신의 삶이 한계로 다가 온다. 그것 때문에 생각대로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자리이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생각은 그곳에서 내려가는 것이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형식이 없는 것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삼을 수 없다. 사람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뱀이 하와를 유혹한 '하나님처럼 되는 것' 그것이다. 알고 보면 사람이 원하는 기적이란 것이 다 육신이라는 형식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형식을 준수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요한 사도가 엄히 경계하고 전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어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내용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자신의 삶의 목적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를 벗어나서 형식으로서의 사람의 자리를 벗어난 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곧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구속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은 사람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자리를 지키시는 것을 완전하게 보여주신 곳이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에서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스스로 내려 올 수 없다. 그리고 또 누구도 십자가의 자리로 가는 것을 피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법 앞에서 항상 죄인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원하는 법, 곧 사람이 자기 한계를 벗어나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그 법, 그 모든 세상 법의 뿌리에서 파생된 법 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죄인이 되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는 2등부터는 뭐라고 수식어를 붙여도 다 패배자 곧 올림픽이 원하는 승자의 법에 의거하여 죄인이 된다. 돈 앞에서는 더할 말이 없다. 돈 좀 있다 싶어도 항상 그 위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즉 돈이라는 기준에서 늘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듯 세상이 원하는 승자의 법에 의하면 모두가 죄인이 된다. 그렇게 죄인이 되면 다 십자가에 달리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고 스스로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시관 쓰신 예수님처럼 생각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입고 계셨던 옷과 같이 내게 씌워진 신분으로도 나를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게 하지 못하며, 못 박힌 손과 발처럼 나의 행동으로도 구원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피요 예수님의 생명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 회복된 인간 본연의 모습이고 정체성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빛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빛과 사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우리는 이 삶을 빛을 만난 것과 같이 어두움에서 행하지 않아도 된다. 즉 인생이 어떤 것인지 훤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승리하는 법으로 승자가 되려고 그렇게 애를 쓰도 되지 않고 캄캄하던 그 삶의 미래와 삶의 목적이 사람은 그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빛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빛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빛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처음으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 예수님의 생명과 같이 우리도 분명한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고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 곧 생명으로 구속을 받는 빛 안에 거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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