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1장 5-10절) 죄(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9. 29. 12:03 Writer : 김홍덕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의 근간은 '존재의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신의 존재 목적에 적합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아닌지? 그것이 바로 죄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되어 지금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왜 사는지를 망각하고 사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실재로 사람들은 살다가 어떤 나이, 혹은 어떤 상황이 되면 불연 듯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혹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와 같은 의문에 휩싸이고 때로 그것이 스스로 자살을 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한번쯤 자신의 존재 목적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이 정할 수는 없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종교라도 신앙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땅에 살았던 어떤 조상이라도 조상이 근원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납득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이렇듯 존재라는 것이 중요한 것은 존재가 정해지면 그 다음에 사는 모습이 정해지고, 또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지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존재의 목적을 파악하지 못한 체 살아가는 모습과 방법에 몰두하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것에 몰입한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대부분 자신의 삶의 목적이나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그 자신이 몰입하고 있는 것에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식이나 또한 예술이나 일과 같은 것이긴 해도, 어쨌든 그런 목적이라도 있다면 하는 일의 장인이 될 수 있다.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사람은 그릇이다. 늘 뭔가를 채워야 한다. 그 안에 물을 채웠다면 물그릇이 될 것이니 물과 같은 삶을 살 것이고, 그 그릇 안에 사랑하는 사람을 채웠다면 그 사람을 위하여 살 것이다. 그릇은 그 담긴 것에 맞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사람 안에 채워져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잡히면 그 사람의 삶은 자연스럽게 성경의 모든 것을 지키고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며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존재의 목적을 떠나서 살면 그 삶이 아무리 위대한 것을 이루었다 해도 그것은 안타깝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 세상이야 하나님께서 말씀만으로 만드신 것인데 그 안에서 세상의 것을 아무리 이루어봤자 새로운 것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 업적도 아니라는 것이다.


간첩을 보자. 그는 국가 안에서 국가의 의와 법에 반하는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많은 사회사업을 해서 유명해지고 많은 기부를 하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해 보자. 그건 하면 할수록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느 날, 그 사람이 간첩인 것이 알려진다면 그에게 도움을 받은 모든 사람도 다 곤란해지는 것이다. 그건 의도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간첩이라는 정체성의 문제인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존재목적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서 많은 것을 이루어 간다면, 이룬 것이 많을수록 죄가 많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의 정체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 안에 있는지 아닌지 그것이 바로 죄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죄라고 하면 법률상의 죄를 떠 올린다, 살인과 도적질 강간과 사기와 같은 것, 그리고 일상 속의 거짓말과 부도덕이나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들을 죄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분명히 죄다. 예수 믿는다고 그것이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의 죄는 시대 상황에서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또 반대로 영웅적 행동이 될 수도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죄의 근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러한 죄는 그 시대와 사회가 정한 법에 따라 심판을 받고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고 그것에서 예외가 된다거나 그냥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그것에 대하여 용서 받았다고 주장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죄가 세상에 있듯이 그런 죄에 대하여 세상의 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모두가 다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의 일부이고 세상인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가 있다고 구원을 불허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네가 누구냐?"하는 그것뿐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 거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그것을 죄의 기준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행위로 범하는 것은 그 시대의 법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신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도전적이거나 무례하지 않기 때문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성품을 일컬어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 곧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해 놓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존재의 목적을 아는 사람의 삶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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