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할 때, 많은 경우 예배에 참예하고 기도하고 성경 보며 또 전도하는 것을 말한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다. 세부적으로 가서 그것을 어떻게 해야 좋은 신앙이 되는지에 대하여는 의논이 분분할 수 있겠지만 신앙생활의 골자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더 깊은 질문을 던져보자. '신앙생활을 왜 하는가?, 하는 목적이 뭔가?'하는 질문을 해 보자. 그러면 여러 가지 답변들이 있겠지만, 답변들을 모아보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와 같은 것들에 수렴하지 않을까 싶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신앙생활의 모습과 목적을 연결해 본다면 그 방향은 신앙생활이라는 행동들의 결과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한 영광도 되며 죽어서는 천국에 가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결과가 신앙생활에 종속된 관계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보편적인 관점은 온전하지 않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천국에 가는 것과 같은 결과의 원인으로 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성경에 <'~을 하라'> 라고 볼 수 있는 말씀들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이라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총 쏜다고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총을 쏘는 것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리라 생각된다.


바로 이러한 생각이 존재에 관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인식해야 다음이 있는 것이다.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과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그 삶이 아무리 영화로워도 출발이 잘못되었기에 다 잘못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중등부 전도사님이 하신 설교 두어 개가 아직도 생각이 나는데, 그 중에 하나가 해적에 관한 비유였다.

해적끼리는 대단한 의리를 가지고 있고, 
서로를 위하여 목숨도 바치는 충성과 우정이 있지만, 
그런 것은 다 소용이 없고 
해적에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국가 앞에 자신이 해적이었다는 것을 자수하는 것이다. 


라고 하신 것이 늘 생각이 난다.


그렇다 해적은 아무리 대단한 업적이 있고, 자신들끼리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과 우정과 충성이 있어도 다 소용없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해적이라는 것을 나라 앞에 자수해야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있어야 다음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준다 해도 하나님이 생각하는 사람의 정체성과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의 정의가 다르면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여! 주여!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 또한 사랑 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다 소용이 없다고 했던 것이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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