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의 함정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7. 3. 19. 20:42 Writer : 김홍덕

기독교 신앙에는 교리가 있습니다. 교리는 ‘체계적인 종교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교리는 그 존재의 명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그 골격을 유지하고, 불순한 이론이나 신앙관과 명백한 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단과의 선명성을 분명하게하기 위한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의를 내려도 될 것 같습니다.


모든 신앙에 있어 ‘이단’은 분명히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세계라도 그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정통성이나 순도를 잘 유지하는 것이 바른 선택이고 정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단과의 경계를 정하므로 그 정통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기됵교 역시 그 방법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립한 교리라는 것, 그리고 그 교리의 존립 이유와 정통성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성경이 정통성을 보장하고 있지 않다면 이는 온전한 신앙을 가지지 못한 것을 가리기 위한 가면에 불과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규율이 없어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애굽에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 과정에서 홍해와 요단강을 건넙니다. 이 과정에서 광야를 지날 때에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뜨거운 낮에는 구름기둥 밑을 지나게 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또한 보호하셨습니다.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단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가이드였습니다. 구름기둥이 일어나서 움직이면 모든 백성들은 자기 짐을 들고서 그 구름기둥을 좇아서 따라가야 했습니다. 이는 불기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대형을 유지하여야 했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에 있어 규율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형을 벗어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가이드를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이나 곤고함을 당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마치 신앙이라는 것이 교리를 벗어나면 이단에 빠지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신호이기는 했지만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세례요한의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즉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니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전하니 <복음>이 전파된다고 했습니다.


광야에서는 어떤 규율이 있어야하고 이를 벗어나면 곤고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이를 역설적으로 본다면 어떤 규율이 있어야 그 신앙이 온전하다면 그의 신앙은 <광야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여정은 분명하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광야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즉 사람에게 약속하시고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광야 곧 규율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자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서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밟는 모든 땅이 너희의 것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유지해온 대형이 해제된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지파의 수장들끼지 상의하여 ‘저 땅을 위하여 너희 지파와 우리 지파가 나누자’와 같이 의사를 정하고 마음대로 자기의 영역을 넘나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나안 땅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약속한 자리로 가면 어떤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을 표현하고 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정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의 생명은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 기물은 쳐서 만들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전의 각종 기물을 만들 때에 금과 은으로 많은 것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하신 것은 단 하나가 아니라, 같은 모양의 것을 여러 개 만들어야 하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금과 은으로 같은 모양을 여러 개 만들라고 하시면서 금과 은을 쳐서 만들라고 했습니다. 같은 모양을 여러 개 만들 때 먼저 금형(틀)을 만들어 금과 은을 녹여서 부어서 만들면 일정하게 나올 것인데 굳이 쳐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쳐서 만들면 아무리 잘 만들어도 똑같기 힘든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저지른 가장 큰 범죄라고 할 수 있는 금송아지는 부어서 만든 것입니다. 큰 금송아지를 단 하나 만드는데도 사람들은 부어서 만드는데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작은 기물들을 만들 때도 반드시 쳐셔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법은 생명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속에서 안으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자라고, 안에 있는 DNA가 모양으로 또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먼저 겉모양을 만들고 그것에 녹여 붓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금과 은이 펴지고 다시 다듬어져서 형상을 이루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부어서 만들라고 하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어떤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형상으로 굳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기물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거하는 장소와 그 내용은 정체성이 같은 것입니다. 커피는 커피 잔에, 콜라는 음료수 컵에 따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성전의 기물을 부어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사람 또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표현하는 하나님의 성품 또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설명하고 규정할 수 없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의 마지막에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다 기록하려면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욥기 후반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쏟아 붓듯 하신 질문을 봐도 사람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정체성이나 한계나 믿음의 범위를 규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정의한다고 해도 무한하신 하나님 안의 어떤 부분집합일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미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고넬료에게 가보라고 하나님이 꿈에서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가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하여 율법에 부정하다고 한 짐승을 꿈에서 먹으라 하시니 베드로는 ‘먹을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하다고 한 것을 어찌하여 부정하다고 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우리가 교리라는 가이드로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은 언제나 모자랍니다. 많은 사도들이 영지주의와 율법주의를 경계하면서 말씀을 전하고 서신을 보낼 때에 복음의 경계를 전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전한 것은 복음의 외형을 바로 잡으려 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씨만 전하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땅에 씨가 심겨서 싹이 나는 것과 같아서 생명이 있는 씨만 전하면 그것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 씨의 생명대로 자라게 됩니다.


영화 쿵푸팬더 1편에서 우그웨이 사부(거북이)와 씨푸 사부(너구리)가 복숭아나무 아래서 이야기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제는 팬더가 용의 전사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씨푸와 믿기만 하면 된다는 우그웨이의 논쟁입니다.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우그웨이에게 씨푸는 복숭아 나무를 차서 복숭아를 떨어뜨리리고 그 중에 하나를 주워 반으로 갈라 씨를 땅에 심으면서 운명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때 우그웨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복숭아씨로 사과가 열리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법은 온전한 하나님의 법이 씨가 땅에 심기듯 사람 안에 심기면 그 씨는 절대로 다른 것이 되지 않습니다. 즉 이단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신앙이 이단이 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라지였거나, 생명이 생명의 본성대로 살지 않아서 그런 것뿐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어떤 것도 교리와 같이 어떤 규정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이단이 되지 않고,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려 한다면 온전한 하나님의 씨만 심으면 되는 것이지 생명이 씨가 싹이 난 다음에 그 생명을 어떻게 다른 것으로 바꾸거나 모양이나 성질을 바꾸려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하여 교리가 필요하다고 여긴다는 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신앙이 생명의 법 밖에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 예수의 정체성 전체를 하나의 교리로 본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정체성 전체를 교리로 보는 것은 온전하나 그것을 규정하려 든다면 그것은 또한 동일한 오류에 빠질 것입니다.



교리는 결론이지 본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많은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리가 하나님 성품과 의와 뜻을 다 포함하지 못하는 부분집합이기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또한 율법주의나 영지주의와 같이 온전치 못한 신앙의 관점을 배척하여야 하는 것 또한 절대적 가치에 준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결론이란 과정과 내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믿고 고백하는데 왜 그런지 모른다면? 또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이신 것은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하여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인데, 교리로 예수는 그리스도라 하면서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고 하면 교리에 어긋난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온전하시면 세상을 경영하신다고 교리를 정하여 놓고서 이 세상이 불온전하고 문제가 많으니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하는 것은 교리를 다시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교회가 가진 모순된 모습입니다. 교리를 넘으면 이단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자기들이 정한 교리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리의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신경과 같은 고백이나 또한 많은 교리들은 마치 율법과 같습니다. 그것을 지켜서 신앙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신앙이 있으면 온전한 고백을 하고 교리로 규정한 모든 것이 그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로 모양을 규정하고 만들 것이 아니라 온전한 생명의 법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과 본성이 온전하면 교리로 정한 것은 자연적으로 갖추어질 것입니다. 내용 없이 교리만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일 뿐입니다. 교리를 지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의만 자기 심령 안에 있으면 그 어떤 교리도 다 지키는 사람이 되고, 생명이 그 본성이 변하지 않듯, 이단으로 변질되는 것 또한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입니다. 표현은 다양합니다. 무궁무진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시려 만드신 이 세상이 얼마나 다양하고 풍성한지 우리가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의 의가 땅에 씨가 심기듯 우리 심령 안에 온전히 심기고 우리의 마음 밭이 잘 경작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의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만 전하고 이것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떤 교리도 온전히 지키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교리는 결국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한 성경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온전하심만 심령에 있다면 절대로 이단이 되지 않습니다. 이단이 되는 것은 심긴 씨가 가라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생명은 전하지 않고 교리만 전하는 거짓 목자들의 씨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의를 자기의 것을 삼는 교만으로 인함이 아니라면 온전한 하나님의 의는 사람으로 인하여 훼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의에 대한 그 정도의 믿음은 있어야 믿음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는 온전한 것이나 그 온전함이 사람의 행동이나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에 있는 것입니다. 즉 심령에 그 교리로 정의될 수 있는 의가 있고 생명이 있을 때 교리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심령에 내재된 사람에게는 흔히 말하는 교리는 다 자기 안에 있기에 그에게는 교리가 온전한 것이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없는데 교리로 자신이 신앙이라고 대변한다거나 사도신경과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은 다 거짓말 하는 것일 뿐입니다.



교리 이전에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훼손될까 염려하여 교리를 옹립하거나, 교리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회칠한 무덤과 같은 신앙일 뿐 아니라 성경을 어떻게 요약하고 정리한 교리도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의는 없이 성경을 요약하고 학문적으로 정리해서 교리로 만들어 믿으면 뭐할 것이며,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삶으로 나타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논하는 것이 이단인데, 그 심령으로 하나님의 정체성이 훼손될까 하여 또 이단이 득세할까 하여 교리를 정립하는 것은 다 거짓된 것입니다. 


따라서 교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성경의 어떤 것으로도 자기 신앙이 고백될 수 있는 심령,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생명이 되어서 그 생명이 표현되는 삶, 성경을 주신 목적이 자기 본성이 되어 살아가면 성경이 자기 이야기가 되는 것이 모든 교리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리라면 온전한 것입니다. 그것이 아닌 모든 교리는 다 노릇일 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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