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민주주의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7. 5. 8. 10:38 Writer : 김홍덕

민주주의 국가에서 의사결정의 최종적인 방법은 <다수결>이라 할 수 있다. 다수결이란 말 그대로 하나의 일에 연관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수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과반 혹은 2/3 이상의 의사를 선택하는 방식을 택한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많은 이들이 원하는 것을 전체의 뜻으로 수용하자는 것에 동의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결정적인 단서가 있다. 다수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다수의 의견을 자신의 의견처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요원하고 힘의 논리에 의하여 달라질 수 있다. 군부의 쿠데타와 같은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볼까? 안타깝게도 성경은 민주주의 방식이 아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뜻’ 그것이 전부이다. 사람의 뜻이 무엇이든, 다수의 뜻이 무엇이든 아무런 가지치 조자 없다. 성경은 단지 하나님의 뜻이 전부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의 의사가 민족이나 나라나 교회나 모든 의사 결정을 한다. 그것이 성경의 관점이고, 성경의 정치라면 정치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이상하게도 민주주의 국가일수록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왕성하다는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가 국가 이념인 국가들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먼저 문명이 발달한 서방 국가들이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국가의 종교로 삼았던 탓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관점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물론 아무 문제를 삼지 않아도 무관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이슈는 절대군주 아니 절대 신권을 바탕으로 말씀하시는 성경을 신앙하는 사람에게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태도다. 민주주의라는 절대 이념에 의하여 결정된 의사나 제도가 자기가 가진 신앙과 맞지 않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쩌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지에 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절대자로서 믿으며, 하나님의 모든 행사에 대하여 순종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와 같이 여기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민주주의나 성경에 나오는 절대 신권주의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요소가 하나 있는데, 결정된 것에 대한 사람의 태도이다. 민주주의 방식이 채택하고 있는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것은 이해관계자 전원이 동의한 것이 아닌 결정사항을 모든 이해관계자가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이 인정되려면 결정된 사항에 동의한 사람의 태도보다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떤 부류이건 결정된 사항이 자기의 뜻인 양 살아가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시위가 일어나고 심지어 동의하지 않은 계층이 가진 힘의 정도가 크면 결정사항이 뒤집히거나 쿠데타와 같은 험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순종>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동일한 자세를 요구한다. 즉 민주주의 국가나 사회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공통적으로 순종이라는 자세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말해본다면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그 사회가 어떤 체제이든 갈등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순종을 아는 사람은 민주주의 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 군주 전제주의 사회든 무관한 삶을 살 수 있지만, 하나님께 순종되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무관하게 항상 불만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때로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기가 기대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기뻐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가진 신앙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하나님께 자기 뜻을 받아주실 것을 기도하고 요구하고 또 사회적으로도 그런 뜻을 피력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가 막무가내로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니 방치해야 그것이 올바른 자세인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나는 이런 질문들을 받을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순종하는 사람은 사회가 어떻게 되어도 방치하듯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야 말로 세상을 가징 온전하게 이끌어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마음인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온전히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하나님을 자신의 신으로 믿는다면 이 보다 더 나은 설명은 없는 것이다.


딴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해 보자. 정치 공약 중에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라는 것이 있다. 나는 그 문구를 볼 때마다 ‘정말로 차별 없는 세상이 될 수 있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가?’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차별이 없어지려면 사람이 자기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욕심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차별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런 공약을 하는 사람 역시 자기 욕심을 분리하고서 정치판에 뛰어 든 것이 아닌데 그런 사람에 의해서 차별 없는 세상이 올 수는 없는 것이다. 


행여 자신은 원치 않는데 옹립된 지도자라면 또 모른다. 사람들이 한 사람을 옹립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그 사람을 옹립하는 마음은 그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자신이 감수해야 할 손해도 감수하겠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풍조와 같이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기생해서 자기 이익을 채우려는 사람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 방법은 없는 것이다.


왜 난데없이 차별 없는 세상을 이야기 했는가 하면, 순종하는 사람은 세상이 좀 더 나아지기 위하여 감수할 손해에 대해서도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종이 아니라 혁명과 혁신을 꿈꾸는 사람들은 손해 없이,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 없이 모두 차별이 없을 것이라는 허언을 한다.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낮아져서 평등하게 될 수는 있어도 모두 높여서 평등하게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로 너를 이겨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이 선함이고 의로움인 세상에서 모두를 높게 한다? 그런 꿈같은 소리는 말 그대로 공약(空約)이다.


순종하는 사람의 가치관이 민주주의에서 유용한 측면은 또 있다.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이 다수의 의견과 같지 않을 때, 자신과 다른 다수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을 믿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은 그것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이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른 정치가 이루어졌을 때 자신이 당하는 원치 않음에 순종할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없다면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된 의사는 때로는 한 부류의 이익과 기쁨을 주고, 또 때로는 그 반대 진영의 이익과 기쁨이 되는 것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순종의 가치를 모른다면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정치 풍조가 어떤 형태라도 자신이 그것에 순종하면서 살 마음이 없다면,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 부인하는 것이기에 민주주의 자격을 넘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세상의 사람들의 주장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것을 수용하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인데, 하나님의 의도 아닌 세상의 의가 자신과 다르다고 순종할 마음이 없고 신앙의 이름으로 항거하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세상은 절대로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에 의하여 바뀌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세상은 할아버지가 어렵게 모은 돈을 정신병을 앓고 있는 손자가 길에 뿌렸을 때 그 돈이 다 돌아오지 않자 그 돈이라 생각하라며 기탁한 사람, 노인이 파란 신호등이 켜져 있을 동안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자 위험을 무릎 쓰고 다시 가서 도운 교복 입은 학생, 아이 맡길 곳이 없어 동동거리는 이웃집 아이를 그냥 맡아주는 사람들에 의하여 바뀌는 것이지 정치가들에 의하여 바뀌지 않는 것이다.


자고로 세상은 “이렇게 되어야 온전한 세상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인하여 시끄럽고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희생하지!’라는 사람으로 인해서 세상은 절대로 시끄럽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보인 감동이 다른 사람을 움직인다. 스스로 감동해서 마음이 움직여서 행동하게 한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바람과 태양의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리를 아는 사람들이 바꾼다. 그들은 자기 세상이 바뀐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속한 세상이 바뀌는 법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하심 아닌가? 각 사람이 순종의 덕을 가지고 사는 것이 있을 때 비로소 신앙도 민주주의도 성경도 지켜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을 알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도 논하지 말고 성경도 논하지 말며 정치도 논할 것이 아니다. 오늘 내 앞에 있는 귀찮은 일이 나의 일로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성경이나 민주주의나 정치는 다 간음과 도적질과 같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앞에 있는 귀찮은 일을 하는 것, 그게 쉬울 것 같은가? 세상에서 그게 가장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아무렇지 않게 외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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