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요한 사도가 표현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형식을 가진 존재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즉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므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라는 내용이 교회라는 형식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 그리스도”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 =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누구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본성이 된 존재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영어로 이것을 표현할 때 예수님은 the Christ, 우리는 a christ 즉 christian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법입니다. 또 육신을 가진 인생을 만드신 것도 그리스도가 되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와 성품이 육신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도록 하시겠다는 것인 육신 가진 인생의 창조하신 목적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목적이 바로 예정이고, 그 예정하심에 순종한 것이 부르심인 것입니다. 부르심은 손뼉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렀는데 대답이 없는 것은 부르심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순종하면 성령께서 순종한 사람 안에서 그 순종이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바울 사도는 ‘성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라는 곳은 어디까지는 성도들이 모인 곳이므로, 결국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예정하신 목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 생명이 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즉 성도가 모인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예배당 건물을 마련하고 십자가를 달아서 사람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들이 자기와 동일한 생명을 사모하므로 찾아서 만나는 그 만남에 바로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성도들이 마치 몸의 세포와 같이 있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거듭난 생명이 모여서 몸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된 교회는 그리스도라는 의가 형식이 된 몸인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과 동일한 개념입니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 즉 내용이 형식과 하나가 된 존재이기에 그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머리 곧 의가 되었다면 그 몸은 그 의가 형식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형식이 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서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궁리하여 하나씩 추가했습니다. 성경에 제사장이 있으니 목회자라는 것을 조각하였습니다. 마치 우상을 만들 듯. 성전을 지었다는 구약의 말씀에 기초하여 교회 건물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 것은 우리 육신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거하실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표현하신 것이기에 성전 건축에는 의미가 가득했는데 지금은 세상의 가치로 좋고 크고, 좋은 음향이나 악기로 채우는 것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다 하나님을 조각한 우상과 같은 것입니다.
특히 바울 사도는 예수님께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교회를 설명함에 더하고 있습니다. ‘충만’이라는 것은 채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충만’은 모든 존재에게 채워져야 할 것이 있고, 그것이 채워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채워짐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만물은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의 의미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모든 피조물의 바라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의가 물리적 형상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한 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형식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 모든 존재의 정체성, 곧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진 분이시기에 그 나타나심의 법 안에 모든 피조물이 속하는 것이므로 그 존재의 목적성과 정체성으로 볼 때 세상의 모든 것이 그 발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아래 있다는 것은 피조물이 존재의 목적으로 채워졌다는 의미이므로 그것이 바로 피조물에게 충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물체나 존재가 그릇과 같이 아무리 채워지고 수용하는 것이 기본적인 속성이라고 해도 다 목적이 있습니다. 자기 것 아닌 것이 채워진 것을 충만하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충만’이라는 것이 그 존재의 목적으로 가득한 것을 말하는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만물을 충만하게 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바로 그런 것이기에 교회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채워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온전한 교회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본성, 자신이 창조된 목적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 충만한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그것이 바로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몸이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이 충만한 존재들이기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곧 의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이 자기 삶의 본성이 된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교회가 되는 이 법을 좇아 교회가 된 것이 아니라면 종교단체일 수는 있어도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라는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온전한 교회의 이름을 도적질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육신의 평안을 복으로 여기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신을 신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라는 이름을 도적적해 간 오늘날 흔히 말하는 교회에 가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 원하고, 그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자기 하나님께 무엇을 행할지 기도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냥 지금같이 살면 될 것이지만, 정말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고자 하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님을 알고자 한다면 교회를 다닐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교회의 몸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능적으로 자신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을 찾아 배와 옷을 버려두고 떠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면, 정말로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자신이 교회의 몸이 되는 그런 전정한 교회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그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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