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죄인인가?’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니까?’와 같은 명제를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증거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시인한 이후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스스로가 죄인임을 시인하기 이전과 동일한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살인과 같이 아주 중한 죄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사소할지라도 어제 회개했던 것을 오늘 또 회개해야 하는 상황에 또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또 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명제 하에 죄를 정의하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위의 어떠함을 죄로 보기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죄를 행위가 어떠한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나, 성경대로 기도하고 십일조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같은 가치관입니다. 사람이 욕을 하고 거짓말을 하면 죄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집에서 새는 쪽박 들에서도 새는 법입니다. 행위로 죄를 판단하는 가치관은 당연히 의로워지는 것도 행위로 이루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세상의 풍속과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어떤 허물이 사람에게 있고, 또 죄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행하니 그 행함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불순종의 영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이런 말씀을 합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이것은 허물과 죄에 빠져 있을 때에 죄와 허물 중에 행하였던 것이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데 ‘행함’이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하고, 세상의 풍속을 죽은 상태에서 좇았다는 것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죄와 연관 지어 죽었다고 말씀하실 때 그 죽음은 육신의 생물학적 혹은 의학적인 죽음의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은 중에 행한다는 것은 몸이 의학적으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몸은 살아 있지만 어떤 관점에서 죽은 상태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죽은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죽었다고 여기시는 삶이라는 것이 바로 세상의 풍속을 좇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풍속은 세상의 가치관, 세상이 가치 있다고 여기기에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정의를 내린 선과 악, 그리고 그 기준으로 심판하고 판결한 의와 죄가 핵심입니다. 즉 세상의 풍속을 좇았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좇았다는 것이고, 가치관은 곧 심판의 기준이므로 그 기준을 좇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가치는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행동 곧 행함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하였느냐와 그 행동이 다른 사람의 육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를 가지고 선함과 악함, 의와 죄를 가늠하는 것이 바로 세상의 기준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가치관의 본질이자 실상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죄라 생각하는 것들이 다 행위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세상의 풍속을 좇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서 벗어난 삶 그 자체입니다. 죄라는 원어 ‘하마티어’가 가진 원 뜻도 ‘자리를 벗어났다.’는 의미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창조 목적의 삶에서 벗어난 상태로 사는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위는 두 번째 관점이고, 먼저 존재 자체가 죄와 사망의 상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죽었다고, 또 사망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행위가 죄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예정하신 창조 목적이 그 사람의 삶의 목적이고 의미인가가 죄인인지 아닌지의 유일한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벗어나서 행한 것은 설사 그것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이라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입니다.
바울 사도가 ‘허물과 죄 가운데서 행하여’라고 하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를 벗어나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바로 죄와 허물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책임이 귀속되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목적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가치를 좇아 살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든 피조물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되었을 뿐인데, 유일하게 사람만은 선악과에 대한 선택도 할 수 있고, 동물의 이름도 지을 수 있고, 좌나 우 선택할 수 있도록 하시고, 그 선택에 따라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보이시고 사람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삶의 목적과 삶의 가치를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하고 난 다음에 스스로 삶의 가치를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으로 하늘에 닿으려 바벨탑을 쌓았고, 세상의 풍요를 가치로 여겨 사람의 딸들을 자기 아내 곧 형식으로 삼았고, 그 자기 안에 있는 가치를 형상화한 우상을 만들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목적대로 살 수도 있고, 그것을 버릴 수도 있는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 선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는 삶,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대로 육신의 평안이 아니라 육신을 종과 죄인과 같이 드려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설사 나라를 구하든, 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식칼이 아주 예리하게 사람을 상하게 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선택을 육신의 욕심을 따른 선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요한 사도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육신이 그 평안을 사모하고 좇는 것을 육신의 정욕을 좇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근원적으로 아담이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스럽고 하나님과 같이 될 것으로 여긴 것도 육신을 가진 삶에 대한 욕심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망 가운데 있었던 상태에 대한 올바른 정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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