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성경에서도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에 대하여 순종해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시키는 것에 대한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 순종하는 것, 그래서 실체를 체험하기 힘든 하나님을 대신해서 목사가, 아니면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순종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어디에 순종하느냐의 문제는 순종하는 이유입니다. 목적이 있는 순종을 순종이라 할 수도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순종은 늘 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벌을 받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벌을 받아 인생이 힘들게 되기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을 전개하는 것은 어디에 순종해야 하는지는 없고, 단지 인생의 곤고함을 피하기 위하여 순종해야 한다는 육신의 욕심이 이끄는 이유만 남은 순종일 뿐입니다. 한 마디로 순종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에서도 명령이나 지시가 불합리함에도 따라야 하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더 극단적입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이삭은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예수님은 미수에 그치지 않고 정말로 아들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불의한 청지기와 같이 순종과는 전혀 거리가 먼 행동이지만 오히려 칭찬을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을 두고 사람들은 불합리적인 지시나 령에 순종해야 하느냐의 문제를 논합니다. 그러나 그런 논란도 잘못된 것입니다.
순종은 행위에 대한 지시나 명령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순종을 행위에 대한 지시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사람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의의 본질을 행위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라!”
그러나 순종은 그것이 아닙니다. 순종의 본질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반하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성경이 불순종을 죄로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목적을 자신의 삶으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적은 순종하지 않으면서 성경을 행위로만 순종하려고 하면서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할지를 궁리하는 한심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순종이 육신의 정욕을 담보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종에 대하여 고민하는 이유는 육신의 수고는 줄이면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으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에 순종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전형적인 모습들입니다. 순종해야할 것이 무엇이지를 모르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이 추구하는 것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이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하여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낸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영의 아들들이 불순종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종해야 할 것에 순종하지 않는 것도 명백한 불순종이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사람 존재 목적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공중 권세 잡은 영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공중권세 잡은 영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순종해야할 주체를 모르고, 자기 육신의 안녕을 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불순종이며 그것은 공중 권세를 잡은 영의 아들 곧 그 영이 가진 의를 육신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공중 권세를 잡았다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공중이라는 것은 그 좌표가 불분명한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공중 권세를 잡고 있다는 것은 불분명하고 어디가 어딘지 알지 못하는 것이 권세가 되어 사람을 주관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인생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왜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공중과 같다는 것입니다. 방행도 목적도 모르는 것이 권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이없게도 권세가 된 것은 육신의 욕심을 인함입니다. 사람이 육신이 바라는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 성경도 지키고, 순종하고, 때로는 자신 안에 그럴 이유가 없지만 육신이 바라는 것을 위하여 신념을 가지고 행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라고 주신 육신을 오히려 평안하게 하고자 순종하게 하는 권세가 생겼는데 그 권세를 정처가 공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권세가 가진 의가 불순종이라는 아들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하여 보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육신을 주신 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과 같이 육신을 종과 같이 소비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라고 주신 것인데, 이를 떠나 반대로 육신의 욕심을 좇다보니 존재의 목적은 알지 못하는 공중과 같이 정처 없는 영과 의에게 권세를 주고 그것에 순종하는 불순종의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불순종은 성경을 지키는 모양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이 너무 중요한 초점입니다. 성경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정말로 온전히 순종하는 것 같지만, 성경을 지켜서 얻고자 하는 반대급부가 있다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따라서 불순종입니다. 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불순종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욕심, 육신의 정욕을 이루려고 자신이 투자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울 사도가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도 그런 자리에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체의 욕심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좇는 것은 불순종이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대상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한 것인데, 사람들이 성경책 들고 일요일에 교회 아닌 예배당에 가서 자기 육신이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지키기 위하여 다짐하는 회칠 속에 불순종을 지그시 감추어 두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불순종, 정처 없는 공중과 같이 자신의 존재 목적도 알려고 하지 않고, 일단 존재한 다음에 인식하는 그 세계에서 바라는 바 육신의 성공과 안녕을 추구하고, 그 욕심과 마음이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순종을 드리고 원하는 바를 얻으려는 기만을 더 이상 신앙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불순종의 자녀, 진노의 자녀로 마감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서하실 리가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자리에서 떠나면 온전한 성도가 된다는 것을 바울 사도와 사도들이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기 죄를 시인한다는 것이 바로 자신이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정처 없는 공중과 같이 자기 존재의 목적도 알지 못하면서 그저 열심히 살고, 성경대로 순종하며 살려하는 그 모든 것이 불순종이며 죄며 사망의 자리임을 알고 자신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 성도요 신실한 자요, 그 사람들이 바로 교회의 몸을 구성을 하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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