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행위 지침, 율법이라고 하는 것을 어긴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글로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문장의 행간은 상상 이상으로 깊은 것입니다.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불순종이라는 것을 시인하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사 인생을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존재하게 한 존재에게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에게서 찾고 그것에 순종하겠다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온전한 창조주라고 믿는 믿음 없이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다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데 잘못될 리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의 벌이라 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하나님께 찾지 않습니다. 아니 그 누구에게도 찾지 않습니다. 그들이 존재의 의미를 찾는 곳은 어이없게도 존재하고 난 다음에 자신이 인지하고 겪어가는 것에서 찾습니다. 천로역정에서 담을 넘어온 순례자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미 존재한 이후에 인지하고 겪어가는 삶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데 그것을 삶의 의미라고 고귀하게 여기면서 삽니다. 그게 바로 어두움이고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며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긍휼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도 풍성한 긍휼을. 긍휼이라는 말은 ‘자궁’이라는 말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혈육 간에 또는 같은 배에서 난 사람들 사이에 가진 마음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에 대하여 존재하는 이상 긍휼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긍휼하심이 결국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임을 바울 사도가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그 만드신 목적이 아들 되게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란 아버지가 가진 의가 형상으로 나타난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와 뜻과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의와 뜻이 육신이라는 형상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나타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목적 아래 있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긍휼하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긍휼하심은 사람이 육신으로 살 동안 언제라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그럴 수 있다는 점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언제든지, 그것이 언제라도 자신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시인하는 순간 성령께서 그 시인하는 마음에 그것을 시인하게 한 먼저 그리스도로 산 이미지가 생명이 되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언제라도 이것이 그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셨기에 사람에 대한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고, 인생을 살 동안 언제라도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의 목적으로 순종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육신을 가진 인생이기에 인생을 사는 동안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하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긍휼은 풍성함 그 자체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려고 할 때 그것에 너무 적합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나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알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전구가 마트에 진열된 상태와 비슷합니다. 존재의 가능성은 온전하지만 상태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상태, 곧 목적의 관점으로 볼 때 죽은 자요 사망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전구가 온전한 상태로 진열장에 있다고 불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듯이.


그렇지만 하나님께는 그와 같은 우리 인생들에게 사랑 곧 존재로서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시는 긍휼이 풍성하시기에 그것을 인하여 우리가 진노의 자식에서 생명이 있는 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그렇게 거듭나게 되는 과정에 있어 인생이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구가 불을 밝히는데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자신을 만든 목적대로 자신의 육신을 드리는 것 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드려 열이 나고 그렇게 소비되어 수명을 다하는 자리에 순종하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조명을 밝히겠다는 목적에 자신이 기여한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듯 전구가 빛을 밝히는 것에 육신을 내어주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자신이 존재하게 된 목적대로 밝은 빛을 내는 것은 완전한 은혜입니다. 자신으로선 할 수 없는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분명히 빛을 밝히기 위하여 만들어졌지만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자신을 만들 때 조명을 밝히겠다는 목적을 가진 이의 모든 예정과 계획안에서 빛을 밝히는 자신의 존재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는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스스로 알 수 없는 인생의 목적을 알도록 우리 앞에서 표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온전하시기에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알려야 하는 인생들과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그 육신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지를 십자가에 보이시므로 그것을 본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 수 있도록 본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모습이 있었기에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다고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가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하여 우리 존재의 목적을 우리의 공로 없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본질적 존재 목적이라는 것만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그 은혜를 입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 같이 우리도 같이 살리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어떠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아량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사람을 그 목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전구를 산 사람은 당연히 조명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전구의 존재 목적에 대한 구원이 되듯,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예정하신 인생 존재 목적을 순종하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돼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고,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한 생명들이 당신이 예정하신 뜻과 의와 계획과 목적대로 살게 되기를 바라는 한결 같은 긍휼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살 동안 언제나 그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우리 앞에서 그 뜻을 보이셨고, 우리는 언제라도 그것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기에 그 긍휼은 우리 사는 동안 어느 한 절 끊임없이 늘 있는 풍성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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