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 손, 연약한 무릎, 저는 다리를 회복하여 고침을 받으라고 하고 이어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회복하면 화평과 거룩함을 좇으라고 했다면 회복하기 전의 상태가 화평과 거룩함이 없었다는 말이다. 화평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않은 상태가 바로 손이 피곤하고 무릎이 연약하며 곧은 길로 가지 않은 상태라는 말이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사람이 서로 화평하지 못하는 것은 이유가 아주 다양할 것 같지만 서로가 의로움을 가지고 있다는 그 하나 때문이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그 하나가 모든 갈등의 근본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므로 갈등하는 사람이라면 구분되지 않고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그것이 거룩하지 않은 것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분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서로 화평하려면 서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 같거나 둘 중에 한 사람 이상이 죄인의 자리로 가는 것밖에 없다. 서로 다른 것을 옳다고 여기는 둘 이상이 화평할 방법은 없다. 물론 하나가 압도적인 권력이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상황은 화평하게 만들 수 있겠지만 그것은 화평이 아니다. 따라서 화평하려면 같은 것은 의롭고 선하게 여기거나 아니면 둘 중에 하나 이상이 자신이 옳지 않다는 자리로 가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낮은 자리로 가라고 하신 뜻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그것이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의 모습과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 아들의 모습은 서로 달랐다. 유대인들은 세상적 가치로 높고 귀한 사람이어야 하나님 아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죄인들과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가지 의가 충돌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자신이 낮은 자리로 가셨다. 낮은 자리로 간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낮추고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서로 다른 의로움이 충돌했을 때, 그러니까 화평하지 못할 상황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이 죄인이 되고 옳지 않은 자가 스스로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 그리스도라는 본성과 성령이 그렇게 이끄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느새 그 자리로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드리시고 더 이상 제사가 없는 제물이 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화평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화평의 왕이고 막힌 담을 모두 허신 것이다. 사람이 서로 갈등하는 모든 담은 내가 죄인이 되면 다 무너지기 때문이다. 둘 중에 하나님 아들이 스스로 죄인이 되므로 옳다는 것이 하나만 남게 되면 화평이 이루어진다. 화평하라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제사가 자신의 제사가 되는 것이 화평함과 거룩함이다. 이 화평이 거룩한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분이 되기에 거룩이다.
이것을 모아보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자리, 곧 하나님의 성품이 삶의 내용이 되고 육신은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이 되는 하나님 아들의 자리를 떠난 죄에서 예수님이 드린 십자가의 희생을 보고 자신이 징계 가운데 있었음을 알고 그 징계 가운데서 피곤하고 연약하며 곧지 못한 삶을 살던 자리에서 예수님의 구속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화평과 거룩함이 회복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이 더 이상 죄 없는 존재임을 믿는 담대함에 있다. 담대함은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근거도 없이 나서면 심한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 담대함은 자신의 삶이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생긴다. 무심한듯 사는데 예수님과 같이 낮은 자리로 가는 자신을 볼 때 담대해지고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면 더 이상 손도 피곤하지 않고 무릎이 연약하지도 않으면 걸음은 항상 곧게 된다. 모든 생명이 자기 본성에 맞게 살 듯 스스로 안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그렇게 할 의도나 작정함이나 신념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보면 “너 옳다”고 하고 자신이 육신으로 수고하는 종의 자리로 가서 사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본다. 그렇게 자신이 사람들 사이에 화평함을 이루고, 남들이 살지 않는 구분된 삶을 사는 것을 본다. 그것에서 자신이 죄가 없음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자신이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자신도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때가 되면 예수님이 구속이 나에게 더 이상 죄가 없게 한 제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항상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이고, 삶에 담대하며 화평과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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