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막 4:21)
이 말씀은 등불을 말 혹은 평상 아래 두지 않는 것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존재 정체성 역시 빛이므로 높이 들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이처럼 바로 인식하려면 먼저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게 곧 구원이다.
그러나 성경의 행간을 읽기보단 문자 그대로 보고, 세상 역시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보는 일반적인 사람은 빛을 물리적 광원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빛은 ‘인식’이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신 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사람에게 시작된다는 의미다.
사실 사람은 빛이 인식이란 걸 무의식중에 알고 있다. ‘컴맹’과 같은 표현이 그렇다. 컴퓨터에 밝음이 없는 것을 어둡다고 하는 게 그 예다. 문맹 역시 같은 맥락이다. 무엇보다 죄에 빠진 사람, 구원이 없는 사람을 두고 성경이 ‘어둡다’라고 하심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는 상태가 어두움이고 혼동의 흑암이며 구원이 없는 죄의 상태다.
이처럼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 목적에 대해 어둡고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기에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정체성이 사람 중에 높이 들려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신이 빛으로서 높이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건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다’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연히 드러날 빛인 예수님과 말씀이 감춰져 있다는 의미로 아직 사람들이 예수님을 빛으로 온전히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등불이 들려져 있지 않은 상태란 말이다.
실제로 성령이 오신 다음에야 극히 일부 사람에게서부터 온전한 그리스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온전히 사람에게 비췬 건 성령이 오신 이후이므로 그 이전에 예수님은 분명 감춰진 빛이었다. 성령이 오시긴 전엔 심지어 제자들조차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물론 예수님은 처음 오실 때부터 온전한 빛이셨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겐 그렇지 않았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죄 가운데 있으므로 알지 못했다는 의미다.
성령이 오시기 전엔 빛이신 예수님께서 높이 들리지 못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서 제대로 등경 위에 올려진 건 바로 십자가다. 하나님의 아들이 금면류관 쓰고 왕이 되어 높이 들린 게 아니라 십자가에 들리신 게 빛으로 높이 들리신 일이다. 등불을 등경 위에 놓아야 한다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놋뱀과 같이 높이 들려야 한다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높이 들린 등불이 모든 사람을 비추듯 십자가에 들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에게 영생이란 빛이 비췬단 것을 말씀하심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15)
구원은 있어선 안 될 어떤 자리, 위험에서 해방되었단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었다고 하려면 구원 이전의 상태부터 명확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이 구원이 필요한 것인지도 알지 못한 상황에선 누구에게 어떤 구원을 청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놀랍게도 구원받았다는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어디서 구원받았는지 사실상 모른다. 말이야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구원받았다면서 기도할 때마다 죄를 회개하는 건 너무 명백한 모순인데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어두운 게 사람이다. 빛이 비취고 모든 걸 인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이 모든 걸 알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들리시므로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라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빛이고 십자가에 들리심이 등불을 높이 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의 핵심은 역시 십자가다.
사람이 구원받아야 할 자리는 자기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바로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데서 구하시는 구원이다. 그리고 이 구원은 예수님께서 등불처럼 십자가에 들리시므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아 높이 들린 등불이 비취므로 모든 것을 바로 인식할 수 있는 빛이 비취듯,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서 자기 삶의 목적을 바로 인식하게 된다. 그게 구원이고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신 이유다. 등불과 같이 십자가에 들리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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