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지식으로 우상의 제물에 대해 자유롭게 행한 이들을 권면한 바울 사도는 세상 지혜로 복음을 조명한 자유를 마치 신앙의 높은 깨달음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사도의 권한을 언급한다. 자유라면 자신이 더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권면의 취지처럼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건 부득불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전 9:15)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묵상하게 한다. 하나는 복음을 전한다는 건 분명 주의 일이므로 그에 합당한 대우가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바울 사도는 그 대우를 굳이 누리지 않는다고 하므로 장성한 신앙의 단계를 제시하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도전을 준다는 것이다.

 

먼저 사도에 대한 대우를 생각해보면, 군인이 자기 돈으로 밥 먹지 않는 것처럼 주의 일을 한다면 그 필요를 주님이, 그의 성도가 감당하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게 바울 사도의 관점이다.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신 율법도 같은 관점이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사도의 정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일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사람이 높아지려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몸소 십자가를 지신 게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의 일이다. 그렇다는 건 우리의 일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할 때 일 역시 하나님의 일이다.

 

바울 사도는 사도로서 자신의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그 복음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복음에 대해 약간 안다고, 그래서 자신이 율법에 대해 자유롭다고 우상의 재물을 보란듯이 먹고, 간음한 자가 교회에 있어도 되는 명분을 만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도됨은 이것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사도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정체성을 버리고 세상 가치관으로 살던 사람이 스스로의 죄를 깨닫도록 십자가에 달리는 본성으로 사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자 그리스도의 본성이며 사도의 삶이다.

 

이렇게 복음을 위한 삶을 사는 사도에게 육신의 재화를 공급하는 건 일면 당연하다. 모세의 율법도, 복음의 도리로도 당연하다. 군인이 자기 돈으로 밥 먹지 않고, 곡식 터는 소가 터는 곡식 일부를 먹도록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모두 이를 보장한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그 필요를 다 아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바울 사도 당시의 사도들 중에는 그런 혜택을 나름 누리는 이들도 있었다고 바울 사도는 언급한다. 그렇지만 바울 사도는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이런 마음은 나중에 받을 상을 위해 적금하듯 참는 것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9:16)

 

그러나 우리가 복음으로 사는 게 그렇게 하기 싫음에도 감옥에 갇힌 포로처럼 강제로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씀한 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바로 생명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표현하는 건 그리스도는 생명이기 때문인데,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이 가진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로 난다는 건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바울 사도와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경적인 삶은 모두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난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가진 본성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생명없이 보면 ~하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거듭난 안목으로 보면 자기 삶이 그럴 수밖에 없음에 동의한다.

 

복음을 전하나 자랑할 게 아니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에게 종처럼 또 낮은 자세로 대하는 이유는 그들을 얻기 위함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한다. 이는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난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음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셨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사도의 권한을 다 쓰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은 사도라는 존재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존재며, 생명의 본성을 거스를 수 없으니 그리스도로 났다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 걸 말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의 삶은 경주에서 이기는 것이라는 말로 그 가치를 설명했다.

 

아무리 생명의 본성 때문이라고 해도 어딘가 억지로 사는 삶처럼 보이는 사도의 삶, 그리스도의 삶이 상을 받는 것이란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부모가 되었을 때 월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녀에게 지고, 섬기듯 수고할 수밖에 없는 부모의 본성대로 살지만 그것이 기쁘고 보람 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와 의미를 누리는 것과 같다.

 

또 사람으로서 사람 다울 때 스스로 느끼는 자부심 또한 그렇다. 생명의 본성에 구속되어 표면적으로 억지로, 그럴 수밖에 없어서 사는 것 같은 그 삶이 진정한 가치인 것을 사람은 충분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오히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전한 삶에서 자신이 이탈할까 두려워했다.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부모로서 미흡할까 염려하는 부모라는 본성을 알면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이런 게 사도의 운명,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의 삶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