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0:1-13) 시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3. 2. 19. 08:26 Writer : 김홍덕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바울 사도는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시험이라 말하는 어려움을 이야기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의 넘어짐과 달리 하나님의 시험은 감당할 수 있는 역치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바울 사도의 말씀은 일면 사람에게 위로가 된다. 어려움에 봉착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하나님의 시험이라 생각한다고 해도 이는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는 건 사람의 한계를 알고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고 하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의 능력과 한계를 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공산품의 성능과 한계를 가장 잘 아는 이들은 바로 개발하고 제조한 사람들이듯 사람의 한계와 능력을 온전히 안다는 건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자란 의미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시험이라고 말하는 어려움들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에 있는 하나님 경영의 일환이다. 사람은 육신의 어려움을 이긴 만큼 육신의 복을 주신다는 관점에서 시험을 이해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이 주신 육신은 어차피 소모품이고, 주신 삶의 기간 동안 하나님의 뜻을 표현할 도구와 같은 형식이다. 그래서 늙고 약해진다. 한 마디로 소비된다.

 

사람의 입장에서 육신이 소비되는 건 어떤 형태로든 어려움이고 피하고 싶은 일이다. 일면 사람이 시험이라 느끼는 일면들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인생을 살면서 겪는 어려움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로서 겪는 당연한 일이고, 어쩌면 의무적인 소비와 곤고함이다.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다.

 

자동차 브레이크를 생각해 보자. 브레이크, 더 정확히는 브레이크 패드를 생각해보면 만든 이의 의도는 패드가 디스크와 마찰하면서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패드는 마찰로 인해 필연적으로 자신이 갈리고 열나고 닳아 없어진다. 하지만 그 힘든 어려움은 시험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목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제조자나 사용자는 성능 이상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님도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험은 우리의 존재 목적에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에 순종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환경 속에서 소비되는 육신의 삶과 그 소비 속에서 겪는 어려움은 원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인 것을 알지만, 창조목적을 알지 못하고 또 순종하지 않는다면 육신의 삶이 겪는 어려움은 마냥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이런 불순종이 낳은 그릇된 인식은 엉뚱한 해결을 도모하게 된다.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을 조각하면 형상 가진 우상이 된다. 그리고 생각 속에서 의지할 대상을 정하거나 만들면 그 또한 우상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이라 이름을 붙여 불러도 하나님의 뜻과 정체성과 달리 육신의 문제 해결을 의지하는 존재라면 그게 이방신이고 우상이 된다.

 

우리 삶 속에 겪는 어려움은 육신을 소비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죄로 인함이 아니다. 더 나은 육신의 복락을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이 어려움을 죄로 여기거나 더 나은 육신의 복락을 위한 연단이나 시험으로 여기는 생각이 진정한 죄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정체성과 그로 인한 사람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험으로 여기는 육신의 소비와 그로 인한 어려움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우리 존재 목적 때문이다. 이게 우리가 감당해야 할 우리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에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고 하신 것이다. 낮아지는 삶은 상대적으로 높인 사람의 뜻을 위해 육신을 소비할 수밖에 없다. 유대인의 뜻에 따르니 십자가에 육신을 내어 주실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육신의 삶을 주신 이유다. 이게 복음이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다. 이 삶 속에 있는 곤고함은 하나님의 괜한 시험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할 우리의 존재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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