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 사도를 통해 복음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교회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젖으로 양육한 아직은 어린 신앙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세상의 지혜를 복음에 접목하여 복음의 가치를 상승시켰고, 이로 인해 신앙의 비교 우위를 다투며 서로 분열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복음에 대한 미숙함은 분열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여러가지 세상 지혜에 편성한 명분으로 간음한 자가 교회에 아무렇지 않게 행세할 수 있도록 했고,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는 자유로움을 지식으로만 알아 낮아지는 십자가라는 복음의 근본은 망각한 체 뭔가를 알았을 때 과시하는 세상 지혜의 방식대로 자랑하듯 우상 제사에 사용된 음식 먹었다. 그 외에도 세상 지혜로 복음을 조명하고 재단하는 자신들을 높였다.
바울 사도는 이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한 말씀으로 크게 책망한다. 바울 사도의 책망은 아주 엄하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본성으로 거듭나는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스스로 온전한 사람이라 여기는 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이스라엘 역사 최대의 범죄와 같다고 책망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라면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우상 숭배와 같이 심각한 타락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이건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겐 현실적인 염려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어떤 <행위>가 하나님을 진노케 하여 벌을 받을까 늘 염려한다. 고전 같지만 ‘술 마시는 게 죄인가?’와 같은 염려에서부터 신앙생활 중 자칫 삐끗할까 늘 염려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들의 이런 신앙, 이런 신앙적 염려는 모순과 허상이다. 먼저 생명은 나면 그 정체성을 버릴 수 없다. 한 번나면 그 생명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 역시 생명이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그리스도답지 못함을 염려할 수는 있어도, 행여 죄를 지어 하나님께 벌을 받아 삶이 힘들어질까 염려하진 않는다.
여기서 잠깐 주제의 본류에서 살짝 벗어난 이야기 같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징계로 여기고 두려워하는 육신의 고난이 그 자체로 죄에 대한 벌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게 아니라 형벌로 유인하신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기독교인들이 두려워하는 신앙의 타락은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의 영역이다. 이어 나오는 사람이 감당할 만한 시험 외에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선 줄로 생각한다는 건 착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험으로 인하여 넘어졌다고 여긴다면 그 또한 감당할 생명이 아닌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역시 그렇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장을 시작하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육신에 속했고, 어린아이 같으며, 젖으로 키웠고, 신령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건 죄가 아니라며 보란듯이 먹고, 간음한 자를 흔쾌히 용납하고, 육신의 관점으로 신앙을 재단하여 상대적 우위를 주장하려 사도의 이름을 팔아 분당했다. 한마디로 이런 어린 상태의 신앙, 더 정확히는 영에 속하지 않고 육신에 속했기에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던 것처럼 타락할 수 있고, 또 그렇다는 것이다.
육에 속했다는 건 신앙 세계에서 어리다 못해 온전한 생명이라 하기 힘든 단계다. 그렇다면 어떤 신앙이 육에 속한 신앙일까? 육에 속했다는 건 육신이 신앙과 가치관과 세계관의 본질이란 뜻이다. 단지 육신의 정욕에 매여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앙으로 유익을 얻는 주체, 신앙이 성취되고, 신앙을 가늠하는 주체가 육신인 신앙이 육에 속한 신앙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어 육신의 삶이 유익해지고 평안하며 뜻대로 되고 성공하기를 기대하는 신앙, 이것이 바로 육에 속한 신앙, 육에 속한 사람이다. 이 구분은 늘 이야기했듯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기도가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 자녀의 형통함이 전부라면 두말할 것 없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다. 이 모든 건 십자가의 방향과 달리 높아지고 이기는 것이니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그리스도의 대척점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이다.
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타락은 정말로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미 타락을 두려워한다는 자체가 자신이 그럴 수 있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대책이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육에 속했기에 육신으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행여 죄를 지어 하나님께 벌을 받아 육신이 곤고하게 될까 두려워한다는 건 육에 속했고, 신령하지 않은 사람이란 방증이다.
바울 사도는 스스로 섰다고 여겨 어린 생명이나 다른 사람의 신앙을 생각지 않고 과시하듯 우상 숭배한 음식을 먹고, 간음한 자를 용납하는 건 금송아지 숭배라는 타락에 빗대어 책망했다. 이런 교만은 타락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아직 구원에 온전하지 않은 신앙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받았다면서 스스로의 타락을 염려하고 행여 시험을 받아 넘어질까 염려하는 이 시대 사람 역시 바울 사도가 책망하는 부류다. 노력한다는 건 아직 이르지 못한 이들의 필수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은 그런 노력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으로 온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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