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견딜 만한 시험만 주신다는 말씀 전후에 우상 숭배의 일을 언급했다.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마음은 출애굽 당시 금송아지를 만든 것처럼 우상을 숭배한 것과 같은 마음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사람이 우상이나 신을 섬기는 이유는 어쩌면 단순하다.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자기 원하는 대로 되기 바라며 의지하는 대상이 신과 우상이다. 따라서 해결하고자 하는 일과 문제의 성격이 신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신이 많은 이유는 인류는 농경사회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농사의 핵심인 기후가 사람의 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이나 우상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는다. 따라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고 섬기는 신이나 지혜는 모두 육신의 문제를 주관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건 눈에 보이는 육신과 육신의 일을 본질로 보고 있다는 증거다. 육신의 형편이 나아지면 축복이고, 육신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징벌이라는 말하는 게 이를 설명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다. 앞서 설명한 신을 찾는 이유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여호와(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행위나 육신의 어떠함이 아니라 존재가 무엇인지를 의로 삼는 분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무엇인지가 정립될 때 만날 수 있는 신이 여호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창조주기 때문이다. 창조하셨다는 건 목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성경이 유일신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오직 하나님만 육신의 일,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지 않는 신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육신의 일을 기준으로 복이나 벌을 주지 않고 육신의 형편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께서 다른 신과 마찬가지로 자기 말에 육신으로 수고한 보상으로 육신의 풍요를 주는 신이라면 예수님이 말구유에 나지도 않고 황금마차를 타고 내려왔을 것이고, 십자가 같은 일은 아예 없었을 것이다.
우상은 산이나 절이나 신당에 있는 게 다가 아니다. 오히려 그건 빙산의 일각이다. 진정한 우상은 일상의 마음 가짐에 있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라고 주신 육신의 삶이란 형식의 어떠함이 곧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라 믿는 게 우상이고, 그 믿음 위에서 육신의 삶에서 겪는 육신의 문제와 소망이 해결되고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의지하는 모든 대상이 바로 우상이며, 그 섬김이 우상 숭배다. 그 대상을 설사 하나님이라 부른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바울 사도가 교회를 향해 우상 숭배를 경고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특히 스스로 선 줄로 아는 이들, 세상 지혜로 복음을 조명하는 걸 수준 높은 신앙이라 여기는 이들은 우상 숭배하는 것을 조심하라고 권면한다. 이 말씀은 오늘날 세상의 지혜나 철학을 가지고 신앙을 조명하고, 설교하고, 훈계하는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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