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가진 기도의 기본 개념은 '사람의 호소가 하늘을 감동하게 해 뜻, 곧 사람이 가지지 못했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룬다.'다. 그래서 하늘에 기도한다.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한다. 하늘이 사람의 운명을 쥐고 있다는 인류의 공통적 개념이 어떤 종교든 언제나 하늘에 기도하고, 하늘에 호소한다. 하늘은 사람이 가지지 못한 모든 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늘에 기도하는 데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점은 <하늘이 어디냐?>는 것과 <사람은 가지지 못했지만 하늘이 가진 게 무엇이냐?>다.
그렇다면 먼저 예수님의 승천을 통해 사람이 구하는 걸 준다고 믿고 있는 하늘이 어디인지를 생각해 보자. 사도행전 1장 6-11절에는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그 모습을 사람들이 보고 있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승천하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어찌하여 하늘을 보고 있느냐?"는 흰옷 입은 사람의 말에서 예수님은 우주 공간으로 올라가신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2,000여 년이 지났다고는 해도 사람이 볼 수 있는 속도로 올라갔다면 몇만 광년(빛이 일 년간 가는 거리)을 논하는 우주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 승천 당시 올라가신 방향이 우주 어느 방향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우주 어디를 봐야 예수님이 가신 하늘인지 특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무심코 또 당연히 머리에 이고 있는 하늘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지만,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이 우주 공간을 한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년부 시절 불렀던 '저 높은 우주에 천국을 만들고 주 믿는 사람 오라네'(물론, 이건 그냥 시적 표현이다.)라는 노래 가사처럼 하늘을 생각하는 건 주기도문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은 우주와 같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주기도문의 하늘은 우주 공간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건 하나님이 우주 공간의 어느 특정 공간에 머무시면서 사람을 감찰하신다는 게 아니라 사람의 운명을 정하시는 분이라는 개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는 있고 사람에겐 없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호칭에 관해 중요한 두 가지 중 두 번째를 이야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알 수 있다. 바로 사람의 운명, 이것이 하나님께는 있고 정작 당사자인 사람에겐 없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해서 얻어야 하는 본질은 바로 사람의 운명, 이것이다.
하나님께는 있고 사람에겐 없는 건 바로 <사람의 운명>
사람이 흔히 <운명>이라고 말하는 건 사실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 목적대로 살아야 알 수 있는 삶의 의미다. 존재가 목적을 벗어나서 의미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통신과 인터넷이라는 목적을 벗어나 망치질하는 곳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정작 사람의 존재 정체성, 곧 존재하는 목적과 삶의 의미가 당사자인 사람에게는 없고 하나님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은 창조주고 사람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자기가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 목적과 의미를 스스로 정립할 수 없다. 반면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곧 정체성을 <스스로 있는(존재하는) 자>라고 밝히셨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하는 건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라는 고백
따라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어야 사람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 만약 사람이 창조되지 않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진화한다는 건 스마트폰이 자기 존재 목적을 스스로 정립하고 스스로 형성했다는 논리다. 게다가 기능 향상도 자기 스스로 정립했던 정체성에 부족함을 인정하고(스스로 부인하고) 더 나은 기능을 스스로 정립한 다음 정체성을 발전시킨다는 이야기가 된다.(그런 능력이 있다면 처음부터 완전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일은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사람도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게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삶의 목적과 의미를 궁금해할 사람은 없다. 어쩌면 목적이니 의미 같은 개념조차 의미가 없다. 자기가 스스로 창출하는데 필요가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건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건 하나님을 창조주로 나는 그의 피조물인 관계를 믿고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육신과 함께 삶을 주신 뜻, 이 하나를 구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내가 존재하는 목적과 내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니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건 내 삶의 목적과 의미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삶의 목적과 의미를 구하는 게 유일한 기도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당연하게 하나님께 육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걸 기도라고 생각하는 건 많은 걸 잘못 아는 것이다. 하늘이 물리적 우주 공간이 아니듯 기도도 형이하학적인 육신의 문제 해결을 구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 아님을 확정했다.
주기도문의 의도대로 존재의 목적이 분명해지면, 그 목적을 위한 삶에 필요한 건 모두 주신다. 무엇이든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하신 당연한 이유다. 예수님께서 단 하나의 기도만 주신 것도 같은 이유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온전히 정립되어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인식하고 그 존재 목적대로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아들도 내어 주시는 분이다. 주기도문은 이 하나님께 나를 창조하신 뜻, 곧 나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을 구하는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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