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기도한다는 것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2. 12. 17:14 Writer : 김홍덕

몇 번의 포스트를 통해 <주기도문>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았다. 주기도문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지만 성경에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주기도문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굳이 꼭 ‘기도’라는 표현이 아니더라도 ‘구하라 주실 것이요’와 같은 말씀들도 있고,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고, 신앙 생활에 있어 정말 중요한 기도라는 것은 도무지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 함으로 주기도문에 대한 포스팅을 마무리할까 한다.

 

먼저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하시는 말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데, 무엇을 구하고 찾으면 어떤 문을 두드릴 것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뭐든지 자기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 그것은 아니다. 육신이 먹고 사는 것에 관해서는 이미 세상에 수많은 농산물에서 비롯된 경제활동에 참여하면 먹고 사는 것은 해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세상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기도할 대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그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도덕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범적으로 살기 위하여 육신이 살아가며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정말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모든 것인가? 아니면 그것에 더해서 그런 식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늘이기 위하여 전도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적 성공을 보여줌으로 육신의 삶의 평안을 갈망하는 세상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셨다고 전도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 정말 그게 신앙의 전부고 기도할 제목이라고 여기는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부터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했지만, 이 지구상에서 전쟁이 없었던 날은 하루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기도는 도무지 안 들으시는 하나님이신가? 이게 이쯤 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도하라고 하시는지 새롭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과연 재화와 용역, 혹은 물리적인 세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존재하시는 분이신가?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일일이 다 들어 주셨다 치자. 근데 죽고 나면 아무 소용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을 매번 기도하고 얻고 한들 지속적인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우스개 소리로 선교사가 아프리카 선교 활동 중에 식인종을 만나게 되어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소서” 기도했더니, 식인종은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했다고 한다. 과연 주기도문이 그렇게 쓰이는 것인가 말이다. 안 그렇겠지 싶겠지만, ‘사업 잘되게 해 주십시오’, ‘좋은 배우자 만나게 해 주십시오’, ‘시험 합격하게 해 주십시오’ 하는 모든 것이 다 그것인 것이다. 그리고 큰교회들이 수능 당일에 시험 시간표에 맞추어 기도하기도 하는데, 그게 얼마나 넌센스인가? 대구 팔공산 갓바위에도 그날은 그렇게 기도한다. 그리고 그건 같은 짓이다. 교회에서 기도한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규정하는 것이므로,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정체성을 농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구하라고 하신 것은 육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에 필요한 보이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구하라 하심은 예수님 자신을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찾으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찾으라는 것이며, 두드리라는 것은 양의 문(요 10장)되시는 예수님을 두드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르치신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모든 내용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와 목적에 합일된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지, 육신의 어떠함에 대한 간구가 아니다. 육신의 어떠함은 주시는 대로 받고 순종하고 감사히 받고 살아가는 문제이지, 그것을 해결해가는 것이 인생의 숙제가 아니다. 다해도 결국 죽으니 못한 꼴이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주기도문의 내용은 구구절절이 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발견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것을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며, 시험이라 함은 우리가 율법을 행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여기는 것과 육신의 연약함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는 것과, 보이는 것이 실상이라고 여기게 되는 시험을 이기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렇게 연약하고 맘대로 못하는 육신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하신 그 마음을 좇아 이 육신으로 사는 삶을 감사히 받고, 이 연약함으로 인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심이며, 우리가 연약하고 세상의 도덕과 윤리 기준으로 볼 때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여기는 악에서 구원하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한 모든 간구는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을 신앙하고 믿는 것이 무엇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거나, 하나님께 무엇을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신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 즉 사람은 연약하고, 육신으로 세상의 모든 법과 윤리를 지킬 수도 없고, 죽지 않을 수도 없으며, 돌로 떡을 만들듯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고백으로 비롯되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성품이신 사랑이 나타내는 것을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의 행동도 다 그의 생각 안에 있는 것이니, 그것이 얼마나 기쁘게 할 수 있으며,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 세상에서 얻은 먼지만도 작은 재물을 드림이 얼마나 기쁘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만들어진 것에 자꾸 무엇을 더하고, 더 행하려 하고, 더 가지려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죄인이라는 고백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에 더해서 뭘 행하고 드리고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그런 것을 구하는 기도는 다 중언부언에 속하는 것이며,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에 관한 기도요 외식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와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칭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을 행함이나 드림이 아니라, 아들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아들은 생명으로 낳아지는 세계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물학적으로 아들을 낳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생명이라는 말씀이시다. 또한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본성과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모든 인간들의 자녀가 그렇지 않은가? 그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요 의가 육신이 되는 것이 바로 아들이요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것,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와 행함에 관하여 그 성품을 나타내지 않으신다. 그런 모든 것이 다 벗겨진 상태가 바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이시다. 가시관은 우리의 생각이, 벗기심은 우리의 신분이, 못 박히심은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곳이 바로 십자가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지, 더 화려해지는 교회나,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에 성공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함과 소유에 대한 의를 버리기를 간구하고, 오직 연약한 모습 이대로를 하나님께 감사히 받아 그것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 되어야지, 밥 달라, 돈 달라, 여자 달라 기도하는 것이 기도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간구는 우리의 삶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 실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기를 간구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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