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에덴 동산에 나오는 생명 나무와 선악과는 까마득한 옛날, 정말 그랬으면 좋을 것 같은 에덴 동산에 있었던 나무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오늘 나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오늘 나는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아닌지, 그리고 나에게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 할 만한 것이 있는 사람, 그러니까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돌아보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 돌아 보았다.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로서 믿는 것도 중요하다. 어쩌면 현대 문명 아래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 과학적 상식, 그리고 사회적인 관념을 넘어서 이 모든 것을 사실로 믿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믿었다 하더라도, <"오늘 나에게 어떤 말씀인가?"> 하는 것이 없다면, 정말로 성경이 내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이 오늘 나에게 어떤 말씀인가 ? 하는 것이 없다면 성경이 내게 무슨 유익인가?
선악과와 생명과 로만 성경을 설명한다면(물론 그건 당연히 가능한 일이다), 사람과 또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의 모든 일들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생각과 관념을 가지고 살아서, 늘 사람 사이에서 문제가 되고 또한 스스로 분이 나는 삶을 살던 사람이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는, 그리고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삶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다툼이 일어나고 스스로 분을 내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왜 그러느냐?"하는 그 생각, 그것이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것이라서 벗어 볼 생각조차 못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보니 사람과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이 결국 어떤 것을 선으로 보고 매진할 것인가?로 고착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너나 나나 둘 다 같은 인간이기에 같은 일에 실수하고, 같은 것을 감추고 싶어한다. 결국은 자신이 처한 형편 상 남들보다 조금 더 잘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은 이래야지>하는 기준이 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주 조금 더 잘하는 그 선함도 하늘에서 보면 63빌딩이나 단층 주택이나 다를 것 없듯, 하나님이 보실 때 아무 것도 아니고, 올림픽에서는 늘 기록이 갱신되고 우승하는 사람이 바뀌어 나타나듯이 내가 '사람은 이래야지!'하는 세계에 있어 나보다 더 잘 지키는 사람은 항상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삶의 목적은 그런 것을 지키며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실재로 그렇게 사는 것이 힘들고,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것에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해적이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자신들이 서로 충성해도 언제나 도망 다녀야 하고 죄인인 것 처럼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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