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구원파니 유병언 회장이니 하면서 떠들석하다. 그런 논란의 한켠에 <이단>이라는 것이 있다.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하나의 관점을 생각해 본다면 <"사람이 신격화 되는가?">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많은 교회나 종교들에서 파생된 이단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교주>가 있고, 또한 그 교주가 하나님과 동격 혹은 하나님과 혈연관계적 위치의 존재라는 개념이나, 혹은 동일한 능력이나 능력의 위임을 받았다는 등의 홍보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성경에 그런 표현들이 제법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신 요한복음 14장 12절의 말씀이 아닌가 싶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성경은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과 기능과 능력을 기반으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염해가고 있다. 그러한 말씀의 기반 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신앙을 전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여지를 두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든가, 야곱이 에서를 보고 '하나님을 보는 것 같다'고 한 것, 또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다'(요 17장)라고 하신 것과 같은 말씀들이 그런 여지가 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더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 처럼 될 수 없다. 아니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처럼> 행동하는 존재가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처럼>, 혹은 <예수님처럼>이라는 표현 속에는 다분히,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에 관한 기대와 그런 능력을 가졌을 때 받는 사람들의 주목에 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적도 다 목적이 있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럼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은 내용이시고 사람은 형식이라는 관점이다. 즉 하나님은 의와 뜻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사람은 그것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육신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서 자주 말해가고 있듯이 <아들>이라는 존재가 바로 아버지의 뜻과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또한 예수님과 동일하게 육신을 가지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이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자동차로 본다면, 자동차의 본 목적이 이동이라는 내용이고, 쇠로 만든 자동차는 형식이다. 즉 하나님은 자동차에 비유하면 이동이라는 목적이시고, 쇠로 만든 자동차는 바로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함께 있어 이동이 가능해지면 그것이 바로 하나가 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단의 교주들을 보면 적어도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 까지는 깨달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단들이 하나님처럼 되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육신이 죽지 않고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과 같이 영원할 수 있겠는가? 문선명도 죽었는데 말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은 하나님은 육이 없으신 영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인 것이다.
이러한 것이 구분이 되지 않으면 몇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높임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려 한다는 것은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꿈을 심으며 교주가 되어 간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온전히 하나님을 아는 것과 이단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현재의 많은 맘모스 교회의 당회장에 대한 예후를 어떻게 볼 것인지 또한 분명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단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교세로 판단이 나기도 하는 세상이다. 한 때는 순복음도 이단이라고 했는데, 교세가 커지니 정통이 되고, 신천지도 이단으로 밀어 붙이는 것이 힘에 부치는지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단과 정통의 기준이 많이 변질된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다.
신앙에 정통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세상의 방법에 따라 성공할수록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변질된 교리가 아니라, 이 연약한 육신, 버리고 싶고, 서로 흉 보고 싶은 이 육신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심을 기억하고, 이 연약한 육신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온전한 도구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정통의 신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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