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기록된 분량 대비 유명세를 따진다면 아마 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들지도 모른다. 그 가장 큰 이유가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팔아 버렸다는 것 때문이다. 그것도 밭죽 한 그릇이라는 헐값에. 하지만 정작 나중에 아비 이삭의 모든 재산은 다 에서가 차지하고, 야곱은 혈혈단신으로 외삼촌에게 도망가서 고생 실컷 모은 재산을 또 형인 에서에게 보내버린다. 즉 장자의 명분을 샀지만 별로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일을 읽으면서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는 것과,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을 받아서 아비 이삭의 축복을 훔치듯 받고서 도망간 것에 주목한다. 여기서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장자의 명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실재로 이삭의 모든 재산 중에 야곱이 차지한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장자의 권한과 야곱이 에서에게서 죽 한 그릇으로 사고, 또 아비를 속여서 받은 축복과 장자의 명분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성경 창세기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 대하여 읽고 묵상하고 말씀을 듣는 것은 그들의 일이 오늘 나의 삶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냥 만화책 보듯이 한번 보는 정도면 모르지만 그것을 가지고 신앙으로, 또 종교로 삼을 정도라면 분명히 이 이야기는 오늘 나의 이야기, 오늘 나의 삶에 대한 말씀이고, 신앙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면서 까지 얻고자 한 장자의 명분은 무엇인가? 그것이 오늘 나에게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야곱과 같이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한다면 그 장자의 명분이 오늘 나의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냥 ‘야곱의 축복’ 찬양만 부를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야곱의 축복이 자신의 축복이 되려면 그 장자의 명분을 나도 사야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야곱이 후에 이룬 부를 그 축복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을 정말로 모르는 신앙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야곱이 그렇게 탐을 낸 아비 이삭의 장자의 명분은 이삭이 가진 재산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다. 그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 그 의가 이삭으로 나타난바 되었고, 그것이 다시 형인 에서와 야곱으로 나타났으나, 표현된 것으로만 보면 에서의 것이 될 수도 있었는데, 야곱은 그 장자의 명분은 육신으로 형과 아우, 누가 먼저 났느냐? 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장자의 명분을 보는 눈이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순간을 보면, 에서는 배가 고파서 그 배를 채울 수 있는 떡과 밭죽 한 그릇에 자신이 가진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다. 그에게는 장자의 명분, 곧 하나님의 의 보다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성공에 대하여 하나님께 의탁하고, 또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과 같이 자신의 육신으로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반면에 야곱은 육신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을 원했다. 야곱이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의 값으로 지불한 것은 밭죽인데, 밭죽이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는 것 보다, 그 색이 붉은 색이라는 것에 복선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담, 곧 사람이라는 뜻이 바로 ‘붉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밭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에 대응되는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에서는 오히려 그 몸이 붉어서 그 이름을 에서라고 했지만, 자신이 인생이라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팔아버렸다. 즉 육신을 가진 인생을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것에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장자의 명분이라는 것이 그렇게 판다고 아버지의 재산이 동생의 것이 되겠는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사람의 삶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분명하다.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의 맏이가 되시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이 가지신 하나님 아들들의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들인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이삭이 가진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께서 그 아비 아브라함을 통하여 나타내신 모든 의, 그것이다. 그 의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으로 나타난 것이고, 또한 그 의가 아들들로 나타난 것이다. 그 장자의 명분의 값,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사는 값은 인생이라는 육신을 드리는 것이다. 그것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는 것이다. 즉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장자의 명분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히려 인생의 본질적인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붉은 존재 인생이 그 인생으로 바꾸어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라는 장자의 명분 그것이다. 에서와 같이 육신의 문제를 그 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장자의 명분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세상의 법이고, 세상적인 표현 방식이다. 그러니까 이방 여자와 결혼한 것이다.
장자의 명분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산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자 신앙하는 모든 사람은 그 장자의 명분을 자신의 인생을 드려서 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신 말씀이 바로 장자의 명분을 밭죽으로 산 것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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