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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시고 또한 먼저 나신 이유는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바울 사도는 전하고 있다. ‘으뜸’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 중에 승리자이자 목표이고 그 세계 안에서 수렴되어야 할 위치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셨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의 목적이 예수님을 나타내려 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관점은 바울 사도의 편지에 있는 내용 중에서 상당히 비중이 있는 계시라고 볼 수 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도 모든 만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사실 로마서 8장은 성경 안에서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이다.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물론 바울 사도가 편지를 기록할 때 장, 절 구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 사도 스스로가 자신 안에 두 가지 법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법이 있고, 또 하나는 육신의 법이 있다고 했다.(롬 7:25) 그리고 그 두 법의 갈등이 있는 자신의 몸을 사망의 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에서 건져낼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부르짖듯이 반문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육신의 법을 좇는 자신의 모습이 있는데, 그러므로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면서 해방으로 넘어가버린다.(롬 8:1)


생각해보면 이건 좀 의문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자신 안에서 마음은 하나님을 좇고 육신은 육신을 좇는데 정죄함이 없다니? 그것이 도무지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앙은 우리 안에서 육신을 좇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면서 그것을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자신을 수련하듯 하는 것이 신앙이라 알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바울 사도가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자신과 예수님이 같은 운명을 가졌기에 자신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운명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바울도 또한 우리도 다 세상의 법으로는 언제나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육신 가진 삶을 사는 존재라는 그 운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 운명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바울 사도를 정죄함이 없는 사람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 안에 있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육신 안에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좇는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 가진 운명 안에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누구나 다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 육신을 스스로 정죄하는 것은 선악의 법이다. 선과 악으로 세상을 구분하고 하나님처럼 되려 하면 육신이 가진 모습은 언제나 정죄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선악의 법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간의 운명을 보이셨기에 그런 육신을 가지고서 씨름하는 인생들의 구주가 되시는 것이다.


그 구주,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아래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 아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나타내는 존재이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요 17장)


그러므로 이 모든 세상을 통하여 그 성품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능력도 또한 신앙을 가졌다면서 무시하고 맘대로 정죄하는 이 세상도 또 사람이 인자하고 사고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있다고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듯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전하고 있는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에도 동일하게 그것을 전하고 있다. 왜냐하면 골로새 교회를 비롯하여 당시의 초대교회에는 영지주의와 또 발달하기 시작한 과학과 철학이 결합된 복음을 가치 있게 여기는 풍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리고 위하여 있다는 것을 전해야 하는 사도로서의 간절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과학이든 철학이든 재물이든 명예든 그 어떤 것도 으뜸 되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다 아래에 있는 것이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있어야 더 온전한 복음이고, 그런 것을 알고 있으면 더 좋은 신앙이고, 세상에서 영광을 얻으면 더 교회에서 존경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하등한 사고이며 으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는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예수께서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셨다고 하신 것에는 바울 안에 있는 큰 계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 그리고 육신을 가진 인생들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며 사는 것이 으뜸이 되는 목적이기에 골로새 교회가 겪고 있는 철학과 학문에 대한 가치 변화를 볼 때, 


그런 모든 것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을 표현할 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 볼 때, 목표가 아니라 그냥 수단이고, 그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두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비롯되었고, 만물과 세상의 학문과 같은 모든 것 역시 그냥 한낱 수단에 불과하고 그리스도로 수렴해야 할 것이기에 그것을 골로새 교회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셨다고 하는 것은 빌립보서에서 말씀하시듯,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데 그렇게 죽고 살아나야 할 모든 사람, 즉 하나님께서 인생으로 창조하셔서 그 성품을 나타낼 것으로 목적으로 두신 모든 사람들 보다 먼저 그 본을 보이셨기에 그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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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죽음 가운에서 먼저 나신 자라고 바울 사도는 전하고 있다. 먼저 나셨다는 것은 당연히 먼저 죽으셨기에 가능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죽은 이유는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 죄인 된 죄목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유대인의 왕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죄를 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당시의 율법과 세상을 상징하는 로마의 법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셨다는 것은 또 어떤 이들이 그렇게 죽을 것이기 때문에 먼저 죽으셨다 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죽을 사람이 또 있었기에 먼저 죽으셨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죽은 사람은 누구인가? 십자가를 거꾸로 진 베드로 외에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십자가에서 죽을 사람이 더 있다는 말씀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같은 이유에서 죽을 사람이 있다는 의미이고, 그 중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이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비단 목숨이 끊어진 것만 죽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면 죽었다고 하듯이 어떤 목적 안에서 볼 때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 창조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도 죽었다고 하셨다. 


그와 같이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법으로 볼 때 예수님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적으로 볼 때 죽어야 하는 죄인, 즉 그 목적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죽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죽으심은 또 그렇게 죽어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이 볼 때, 즉 종교적인 형식을 준수하는 면이나, 세상적인인 성공에 대한 가치관이 가진 목적으로 볼 때는 시계가 멈춘 것과 같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죽인 것이다. 마치 고장 난 시계를 버리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죽고 또 그분과 함께 살려고 한다면 먼저 죽어야 할 것이고, 그 죽는 이유가 예수님이 먼저 되셨다고 보증할 수 있게 같은 이유로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종교적인 형식의 준수와 세상적인인 성공이라는 가치로 볼 때 우리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달으면 예수님과 같이 죽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모든 종교는 세상적인인 목적으로 볼 때 자신이 죽은 자로 발견되려 하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종교의 힘을 빌려 세상적인으로 성공하고 평안을 얻으려 하고 있고, 이것에 대하여 기독교도 아니라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우리가 정말 예수를 믿으려 한다면, 그런 세상적인인 가치관은 그냥 살아가는 한 방법과 수단에 그쳐야지 예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되고, 그 성공을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리려 하는 것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죽은 자는 또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살리실 것인데, 그것이 구원이고 부활인 것이다. 비록 죽는 이유가 세상적인인 실패자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발견한 사람을 오히려 의로 여기셔서 살리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래서 건축자의 버린 돌을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다(행 4:11, 벧전 2:7)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을 외면할 이유는 없다. 또 그래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목적인 사람은 신앙도 수단이 되고, 무엇보다 그것에 실패하면 인생을 실패했다 여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라고 우리를 보내신 것이 아니다. 그럴 거면 죽지 않게 하셨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수단으로 알고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면 로마인과 유대인들처럼 성공하지 못하면 심판을 하게 되고,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는 되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같은 이유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발견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성공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첫걸음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을 먼저 살리셨듯 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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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구성이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다는 것임을 먼저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앞에서 포스팅한 것과 같이 세상에 어떤 부분은 하나님이 주관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고, 이것을 마귀나 세상이 다스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곳에 빠져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러한 세계를 적으로 삼고 싸우시며 그 싸움의 대장이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어쩌면 난센스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만드시고, 그 만드신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한 표현 양식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표현하시고자 하는 것을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이고, 표현 양식이며, 내용이신 하나님의 형식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표현하고자 하시는 최고의 성품은 <사랑>이시니, 이를 요한 사도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고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그 최고의 성품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드신 존재가 사람이고, 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 성품을 육신으로 표현하게 되는 존재를 그리스도라 하시고,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먼저 하나님의 로고스가 육신이 되게 하셨으니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은 비록 그것이 마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나오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도구들이기에,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은 탄식하며 고통당하면서 까지 고대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그리스도의 처음이 되셨으니, 이것은 앞으로 오고 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인생이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몸소 보이시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the Christ)를 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하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a Christ)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에 그가 무엇을 보이고자 하셨는지를 알고 그것을 본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 받아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끌려갈 때 하늘의 천군천사가 와서 구원한 분이 아니다. 또한 빌라도와 유창한 말로 변론하여 무죄를 입증하신 분도 아니시고, 유대인들 보다 더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신 분은 더더욱 아니시다. 오히려 그런 것 앞에 죄인이 되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흔히들 세상을 이기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세상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 더 유리한 자리에 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란 듯이 이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니다 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진정으로 그렇지 않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 부자가 되어서, 또 경쟁에서 이긴 자로 무대에 서서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오히려 그렇게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기 에는 너무 초라했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기 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는 세상의 성공도,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지신 것이다.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세상의 경쟁과 법 앞에서 죄인 되신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 되셨다고 바울 사도는 말씀하고 있다.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은 육신으로 죽은 자 가운에서라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세상의 법과 선악의 법으로 볼 때 죽은 자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명예가 있으면 더 선한 사람이 되고 사람들 중에 더 영광을 받고 인정을 받는 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죄인이 되고 결국은 죽은 자와 같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죽은 자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또한 그 처음이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볼 때, 세상의 법으로 볼 때는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 즉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다 세상의 법으로 볼 때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 죽음을 당한 죽은 자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오히려 살아 있다 할 수 있는, 즉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온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살리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살아 있다.'는 것은 육신으로 살아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되는지 아닌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의 기준이 되는 법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고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을 알기 위하여 산 시계가 가지 않으면 ‘죽었다’하듯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수행하지 않고 있는 모든 인생은 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인 것이다.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하여 사노라 하며 금식하고 울부짖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의 법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의 법은 피라미드와 같고, 객관적이며 조직적이다. 더 가진 자가 더 높이 있는 것이다. 목사도 신학이라는 옵션과 종교적 행위인 기도 등을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더 높은 곳에 서서 설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세상의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법으로 심판 받아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죽은 자가 바로 그 법에 의하여 죽은 자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법 아래에서 그 법을 따라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외쳐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운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십자가의 법이다. 십자가는 피라미드와 같이 올라가야만 의로워지는 그 법 앞에서 죄인이 되는 세계이고, 죽어 나가야 하는 세계이다. 


그 세계의 문이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보여주신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할 때, 하나님의 법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죽음을 벗어나는 길인 것이다.


즉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는 모든 인생은 다 죽은 것이며, 부활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은 그 십자가의 의미와 법에 따라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이니, 그 법을 좇지 않는 사람에게 다시 사는 세계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죽은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심은 하나님의 목적을 나타내시니 세상의 법이 그를 죽인 그 죽음을 먼저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운명이고 존재의 목적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에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즉 이 육신의 삶을 온전한 것으로 여기고 


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려 하는 사람이 그 이유로 죽은 죽음을 당할 때 그 죽음에서 하나님이 살리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오히려 산 것이기 때문이다. 그 죽음을 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삶으로 당하는 죽음, 그 죽음을 당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살리시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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