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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1-2 하나님의 뜻으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1. 15. 13:37 Writer : 김홍덕


출처 : KCM 성경사전


골로새교회는 에바브로가 세운교회고, 골로새서는 바울이 옥중에서 쓴 편지인 옥중서신의 하나이다. 골로새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어, 교회에 철학과 과학과 같은 세상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와서 복음과 결합하게 되고 이를 바울이 경계하기 위하여 쓴 편지이다.(성경의 배경과 신학적 지식은 전문적인 사람들이 있으므로 여기까지…….)


골로새서 1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1:1)" 이라고 시작한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함에 있어, 골로새서를 쓴 목적이 세상의 지식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자신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당대 최고의 석학 중 하나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점과 같이 세상의 경쟁력을 먼저 소개해야할지 모르지만, 


의외로 자신을 소개함에 있어 바울은 이 편지가 교회에 쓰는 편지이고 또한 신실한 형제들에게 쓰는(1:2) 편지이기에 자기의 정체성이 세상적인 경쟁력에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라 소개하고, 또한 혈육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형제인 디모데를 형제라고 소개함으로써,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하나님 안에 두고 있다.


즉,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쓸 수 있는 자격이라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주신 자신의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울은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원래의 이름은 사울(뜻: 큰 자)이다. 그는 복음을 믿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스데반이 순교할 때 돌로 치는 사람들의 옷을 맡은 사람으로 스데반이 돌에 맞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기 위하여 가는 길에 다메석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돌이키고 사도가 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옥중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가 되었는데, 이러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된 일



하나님의 뜻으로 된 일은 한마디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되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한다. 자기가 육신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낸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 명명하는 일들이 많다. 예를 들어 자기가 공부해서 목사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보통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 일이 되었다는 것을 보통은 기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기적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있겠지만 아마 <사람이 변하는 것> 만한 기적은 없을 것이다. 바울 역시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다 하는 것은 다메석에서 기이한 빛을 본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이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은 모습이나 성격, 혹은 행동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바뀌는 기적은 사람 안에 있어 그 사람의 모든 삶의 방식과 모양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생명과 정체성 그것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바뀌는 것 그것이 있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된 기적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은 알기 어렵고 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기도한다. 더욱이 혼자 기도해서 잘 모르겠다면 이른바 '영발' 좋다는 사람을 찾아서 기도를 부탁하기도 한다. 무당 찾아가듯이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에게 어려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지 사람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또 사람을 만드실 때 가장 적합하게 두신 뜻이 사람에게 어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큰 교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는 큰 교회의 교역자들이 시험 쳐서 목사가 된 것이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다. 그저 신분이 목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는데, 십자가 아래에서 백부장이 십자가에 달리신 벌거벗겨진 죄인 예수님을 보고서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했던 것 같이, 교인들이 그 목자들을 보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교인들이 할 수 없는 일인 신학적 지식으로 교인들을 가르칠 수 있고, 위엄 있게 옷을 차려입고서 강단에 서서 가르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들은 교인들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즉 그들과 같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모습만 보여줄 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듯 너희도 하나이다(요 17).“

하심 같이, 큰 교회의 목사처럼 하지 않아도 자기의 삶이 그리스도를 닮아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게 할 수 있는가 할 때,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법과 가치관에서 볼 때 죄인인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되게 하심이다. 그러므로 그저 평범한 교인들, 세상적 삶에 허덕이고 때로 그 안에서 사회적인 법과 도덕을 배반하며 살게 되어 그 정체성이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되더라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질 수 있게 하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 자신을 하나님의 사도로 세운 그 하나님의 뜻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도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표현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교훈이 교회에 들어온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옥중에서 편지를 쓰는 바울 사도에게 하나님의 뜻은 자신이 경계하고자 하는 세상의 철학과 지식과는 전혀 다른 아주 쉽고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고, 자신은 그 뜻으로 사도가 되었으며, 그 뜻을 전하는 사도로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당시의 철학과 지식이 교회에 들어와서 마치 그것 없이는 부족한 교인인 것처럼 비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골로새서를 기록하였고, 그 머리에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나 바울은>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이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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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냐? 존재냐?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1. 9. 10:16 Writer : 김홍덕

난 군대를 대학을 졸업하고선 갔다. 군에서의 생활이란 남자들은 다 알겠지만, 사회에서 그 지위가 어떠하던 자기 계급에 맞는 행동양식과 정신을 요구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 곳에 있으면, 자기가 사회에서 교회에 다닐 때에 리더를 했던 목사를 했던 상관없다. 오직 자기 옆에 있는 사람과 동일한 모양으로 살아야 한다. 그건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삶의 모습이 어떠하던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군에 있는 동안 그때까지 내가 입고 있던 모던 종교적인 옷을 벗고서(벗겨졌지만) 그 날까지의 신앙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난 지금도 신앙적 측면에서 군을 잘 다녀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군 생활 속에서 심각한 의문이 생겼다. 기상시간 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기도를 하는 날은 저녁 시간에 집합이 덜 한 것 같고, 그렇지 않은 날이면 자주 저녁에 집합이 있곤 했는데, 난 그게 너무 이상했다.


그때 난 '이건 뭐 무당 굿하는 것과 비교하면 신만 다를뿐이지 같은 시스템이구만'하는 의문이 들었다. 실제 그렇다. 무당은 산신령께(?) 굿을 하고,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다. 산신령<->하나님, 굿<->기도, 이렇게 딱 매칭이 되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 그것이 동일했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산신령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문제라고 볼지 모르지만 그 두 신앙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이 같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즉 신을 섬기는 목적이 같다는 것이다. 아마 내가 좀 더 경건한(?) 기독교인이었다면? 난 저녁에 집합이 없도록 해 달라고 아침 기도를 거르지 않으려 노력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땐 분명히 몰랐지만 그렇게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해당하는 문제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자유함의 문제로 다가왔다. 정말 자유하다면 기도를 하던 안하던 삶은 동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유가 육신을 얽매는 삶의 문제에 대한 자유라면 말이다. 참 하나님, 즉 존재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내 육신의 삶의 모양이 집합을 좀 당하던 좀 구속을 받게 되어도 난 하나님을 믿는 일에 의심이나 구속함이 없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났고, '난 진리이신 예수님을 아는데 내 모습은 자유하지 않구나 ?' 생각했다.


그 이후 내 신앙의 의문과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두 가지중 하나였다. 내가 이때까지 예수를 잘못 믿었거나, 예수가 희대의 사기꾼이거나, 그 둘중의 하나라 생각했다. 그 의문은 전역 후에도 가시지 않았고, 전역 이후에 내 친구가 '교회가 더 이상 가르쳐 주는 것이 없다'며 떠나갈때도 할말도 없고 붙잡지도 못하는 꼴이 되었고, 토요일이면 다음날 새벽까지 고스톱 치며 놀다가 부시시한 모습으로 교회에 가서는 고등부 교사를 하러 가는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다 한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난 그 날까지의 모든 의문을 질문 하나에 담아 질문을 했다.


"목사님!, 이 기독교 신앙이 Do에 관한 것입니까? Be에 관한 것입니까?" 라고


내심 나는 이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어쩌면 지금도 양심이 있고, 자기의 삶이 그 어느 것 중에 하나라고 확신하는 목사가 아니라면 쉽게 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내 질문이 끝나기도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간략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BE에 관한 것이다!!> 


그 순간은 내 일생 일대의 사건이었고, 내 삶의 절대 전환점이었고, 가장 잘한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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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교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 Date : 2012. 12. 26. 14:44 Writer : 김홍덕

우리나라에는 큰 교회들이 많다. 어찌보면 규모에 관계 없이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교회는 다 큰교회이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가 교회가 커지는 것을 부흥이라 여기고, 또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축복하심이라 여긴다. 그래서 일단 교회라는 간판을 걸었다 하면, 다 큰교회가 되기를 꿈꾼다. 그러하기에 우리나라에 있는 거의 모든 교회는 다 <큰 교회>이다.





사실 교회가 크다거나, 부흥 할려고 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도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큰 교회와 큰 교회를 지향하는 모든 교회가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매주 최소한 3차례 정도의 예배를 드리고, 교회의 능력에 따라서는 자체적인 성경공부를 하는 교회도 참 많은데, 교인들은 늘 의문에 쌓여있고, 정작 뭔가 물어보면 신학을 했다는 사람들의 질문은 모호하며, 질문에 질문을 거듭해 보면 결론은 늘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만 돌아온다.


대학에 다닐때 간호대에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어머니는 무당이었고,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돌아가셨다. 그녀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간호대에 들어갔고, 기독교 계통의 학교의 영향 때문인지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내가 다니는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나와 참 친하게 지냈다. 그녀는 복음에 대한 소망함이 아주 컸다. 그러다 난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가게 되었고, 제대 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후 잠시 다시 교회를 나온 그 친구는 어느날 내게 다가와서 


"나 더 이상 교회에 못 나오겠다"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내가 알고 싶은 것을 교회가 가르쳐 주지 않는다."라며 교회를 떠나 갔다.


그리고 그녀는 몇 해 후 성당에서 결혼했고, 지금은 어떤 신앙도 가지지 않고 있다. 또 대학 당시 내가 회장을 할 때 정말 열심으로 돕던 부회장을 한 후배도 절에서 길혼식하고 시집 가 버렸다. 물론 아주 열심에 열심을 더해서 지금 큰 교회의 목사가 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교회가 가르쳐주는 것이 없다고 떠난 그 말은 나에게 있어서도 그 이후 신앙에 있어 큰 영향을 주었다.


만약 지금의 큰 교회가, 교회의 건물, 교회의 재정, 위엄있는 강대상, 웅장한 음향, 아주 관리가 잘된 조직력과 같은 구성요소를 다 제거했을 그 때도 그 안에서 모여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나눌 수 있는가?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한번도 그런 것을 의탁해서 복음을 전하신 적이 없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지하무덤에서도 교회가 풍성했다. 즉 그것은 교회란 굳이 자본주의적 산물인 건물이나 재정이나 성도 수나 관리나 웅장한 음향이나 화려한 조명이 교회의 요소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있으면 좋은 것일 뿐이다.


큰 교회는 그런 것이 다 있거나, 늘 추구한다. 아니 솔직히 그것 뿐이다. 교인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그것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늘 <하나님은 누구신가?>, 또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갈망과, 진정으로 나와 상관 있는 하나님, 도저히 떠날 수 없는 교회와 형제자매를 원할지 모른다. 그것은 한마디로 <<삶의 목적>>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원한다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큰 교회는 하나님께서는 그저 말씀 만으로도 지으실 수 있는 세상 속에서 우주에서 보면 보이지도 않는 교회의 화려함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며 그것을 향해 질주 하느라, 물질이나 건물에 전혀 아쉬움 없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왜 만드셨는지는 등지고 살아간다. 그게 <큰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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