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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창조물보다 예수님이 먼저 계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하신 창세기 1장 26절을 기준으로,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미 세상을 만드실 그 때에 예수님이 계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해보다는 '무조건 믿어라'는 강요에 가까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시간의 개념은 크로노스(Cronous)의 시간개념 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객관적인 시간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은 12시다 라고 하는 것은 크로노스 적인 개념이다. 반면에 ‘카이로스(Kairos)’라는 것이 있다. 카이로스의 점심시간은 내가 배고플 때인 것이다. 


크로노스는 객관적인 시간이 때를 정하고, 카이로스는 목적이 때를 정한다. 크로노스는 시간이 기준이고, 카이로스는 목적이 기준이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12시가 되면 밥 먹어야 한다는 것은 시간이 기준이고, 내가 배고플 때, 그 때가 식사시간이라는 것은 배가 고파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그 목적이 시간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초가 열릴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실 의도와 사람에 대한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계셨고, 그 목적이 육신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신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보자. 집을 지을 때 집이 먼저인가 아니면 집을 짓겠다는 생각과 설계도가 먼저인가? 그건 당연히 집을 지으려는 의도와 그것이 구체화된 설계도가 먼저인 것 아니겠는가? 그렇듯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하나님 안에는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가 먼저 계셨고, 그렇게 표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며, 예수님께서 바로 그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되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만물이 그를 위하여 또한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하셨고, 그리스도가 만물의 근원이 되신다고 하신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느니라(있었느니라가 아니라 있느니라.)(요 8:58)

하셨으며,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온 세상이 지향하는 하나님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인생이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그 모든 것의 시작 이전에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있었기에 그리스도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되신 것이다.


그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그는 지금 교회에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세상적인인 성공이 있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교회로 오게 된다고 하는 현재의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니다. 


설사 세상적인으로 성공한 기독교인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되어야겠다고 교회로 온다고 쳐도 그 사람이 교회에 오는 목적은 이미 세상적인인 성공을 위하여 교회에 오는 사람이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다. 그 하나님이 누구든지 간에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잘 먹고 잘 살게 해 준다니 교회에 온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하여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은 다 간첩이 기부하고 봉사활동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미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행위의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바알의 신앙을 가진 사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이란 그런 것을 그리스도로 받고 먹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인생이 연약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법과 의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법과 로마의 법에 의하면 죄인 될 수밖에 없는 정체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 법의 집행에 따라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도 초인적인 기적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그저 죽어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의 모습을 보이시기까지 하신 것이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 “아 내가 바로 저런 존재구나!!”라는 고백이 나올 때, 내가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모습과 같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듯,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렇게 초라한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또한 나도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는 고백이기에 그게 바로 구원이고, 그것이 바로 신앙인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바로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기에, 그것을 자기의 정체성이고 사는 목적이며, 또한 그런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라고 받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사는 자,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있는 의를 가진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의 존재 목적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람이 그런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운명과 정체성으로 받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나타나는 것을 목적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것이다. 이 세상, 온 천하 만물이 다 그런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한 사람이 나오게 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말씀이다. 그냥 자기 맘대로 사는 인생들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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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장 6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는 표현을 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기본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는 아들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몇 년 전에  최요삼이라는 권투선수가 경기 중 당한 부상으로 뇌사 판정을 받아서 장기기증을 한 후 삶을 떠난 사건이 있었다. 최요삼 선수에게는 평소 아버지처럼 여기던 박태훈(전 숭민프로모션 사장)이라는 분이 계셨다. 성이 다르니 생부는 아니지만 그는 그분을 아버지라 여겼다 한다. 그렇듯 아들이란 존재는 생물학적인 아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들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뜻이 육신으로 나타났을 때, 그 존재를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생물학적인 부자관계 역시,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자손을 두기 원하는 그 마음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를 두고 아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어떤 사람이 가진 뜻을 이루어내는 후세의 사람을 많은 경우 아들과 같이 여긴다. 그렇듯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의와 뜻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 그리고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것을 이어가는 존재가 바로 아들이며, 그 아들이 아버지의 뜻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아들과 성육신이란 말씀이 바로 이러한 세계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이 있었다. 그것은 연약한 육신을 가진 존재로 살면서 서로 사랑함으로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하시기 위하여 창조하신 존재였다. 


그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도 하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외모가 사람의 모습처럼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그 뜻을 가지고 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고, 성육신되신 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것이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입었다는 것도 우리가 그러한 법 아래에서 아들이 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 아들 안에서>라고 하는 것은 공간적으로 예수님 안에서라던가, 아니면 교회 안에서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 법의 세계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고 뜻이기에,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살면 그 아들 안에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아들 안에서 구속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지금의 큰 교회처럼 위대해지고 화려해지고 교인들이 사회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교회 안에서도 돈 있고 학식 있는 사람이 신앙 있는 사람이고 장로가 되는 그런 법을 보이셨던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스스로 내려오시는 기적을 보여주셔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보증을 받았는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지금의 큰 교회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바리새인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그러니 지금의 큰 교회들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지금의 큰 교회들이 가르치듯,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는 것과 헌금을 많이 할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은행처럼 받아 두셨다가 죽고 나면 이자 쳐서 부유하게 해 주신다고 가르치는 것과, 교회에 봉사를 많이 할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가르치는 그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즉 세상이 옳다 하는 가치관, 소유와 공로가 있어야 인정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긴다는 그 가치관으로 볼 때 정말 보잘것없는 초라한 모습, 또 그 가치관 앞에서 하염없이 죄인 되셨고, 그 모습을 내 모습이라고 인정하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목적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두신 목적이기에 내가 그렇게 고백될 때 내가 <그 아들 안에서> 아들이 되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죄 사함인 것이요, 죄인이 아들이 되는 것이며, 빚이 기업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것을 본 백부장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백했다. 하늘이 어두워져서 그런 것도 아니다. 성전의 막이 찢어져서 그런 것도 아니다.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가 성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 하셨다.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이 아니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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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의 권세라는 것, 흑암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그것의 권세라는 것은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기에 따르는 대세 같은 것이 바로 흑암의 권세인 것이다. 마치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와 같이 보이는 사람들로서는 알 수 없는 암묵적 동의와 공포에 순종하는 그 모습이 바로 흑암의 권세인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흑암은 눈이 보이지 않거나 조명이 어두워진 상태를 말하는 한정적인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흑암과 어두움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컴퓨터를 알지 못하면 눈을 뜨고 있고 사회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어도 컴맹이라고 하듯, 하나님에 대하여도 알지 못하면 그가 육신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지장이 없어도 그는 어두운 사람인 것이다.


그런 어두움에는 권세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수결의 원칙처럼 그냥 대세를 따르는 그것이 가장 큰 권세이다. 맹인 만 명이 있어도 눈 뜬 사람 한 명의 안목보다 못한 것이다. 그것처럼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그렇게 많고 하나님을 안다고 떠드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과 제사장들이 그렇게 많아도 예수님 한 분 보다 못했던 것이다. 그 유대인들은 다 어두운자요 맹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것이다. 그렇게 육신을 고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영적인 어두움을 고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때, 예수님이 계시던 그 시절의 유대인들과 백성들처럼,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살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뭔가 더 역량이 되는 사람이 인정을 받는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기고 때로 실례가 있다 해도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의 흐름은 교수가 장로 되는 것이 전과자지만 진정한 신앙고백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당연히 쉬운 것일 뿐 아니라, 신앙고백을 장로임직 때 내는 돈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흐름에 대하여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 그것이 바로 흑암의 권세인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냥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권세인 것이다. 그 권세를 지금의 큰 교회들의 목사들이 가지고 있다. 장로들과 유연하게 말이다.


사실 골로새서가 쓰인 이유가 바로 이러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 당시에도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인 에바브라보다 세상적인인 지식이 가미된 사람들이 교회에서 더 인정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하여 쓴 바울 사도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풍조는 당시 모든 사도들의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특히 사도요한은 요한 1서를 통하여 이러한 사람들을 적그리스도라도 규정하기도 했다. 바울 역시 이것이 단순히 골로새교회의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여겼기에 이렇게 본적도 없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교회들도 동일한 흐름 안에 쌓여있을 뿐 아니라, 큰 교회는 앞장서고 있기도 하다.


바울 사도는 그러한 흑암의 권세의 반대편, 즉 흑암의 권세가 아니라 밝은 세계에 대하여 이르기를 <사랑의 아들의 나라>라고 했다. 흑암의 권세의 반대가 밝음의 권세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사랑의 아들의 나라’라고 한 것이다. 즉 ‘흑암↔아들의 나라’, ‘권세 ↔사랑’이라는 대립 구조를 설정한 것이다. 흑암의 반대가 아들의 나라라고 한 것은 어두움의 대상이 바로 생명에 대하여 어둡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의 관계로 만나지는 아들이라는 그 관계성이 바로 생명의 대표이며, 생명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흑암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 삼으시기 원하는 생명의 아버지이심을 아는 것이 바로 컴맹을 탈출하듯 흑암을 벗어난 세계인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권세와는 달리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힘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것이 권세라면, 사랑은 연약함을 기반으로 생기는 것이다. 즉, 권세는 강해질수록 생기는 것이라면 사랑은 약하면 약할수록 자아내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내가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라고 여기면 여길수록 흑암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저는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진리를 받아들일수록 사랑이 생기는 것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관계는 아무런 수고도 공로도 소유도 요구하지 않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안에서 온전해 지는 것이기에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위나 공로나 소유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공로주의적 신앙에서, 하나님 앞에서 아들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그저 낳아지는 생명의 관계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연약한 인생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 그리고 그 안에는 아들이 존재 자체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듯, 권세를 일으키는 능력이나 소유나 공로가 없어도 되는 세계로 우리를 옮기셨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리고 14절에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하신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에 보내신 목적의 빚을 갚는 것은 어떤 소유나 공로를 하나님께 드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아들이 되는 세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이요, 우리의 죄를 사함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사는 것이 흑암의 권세인 공로와 소유로서가 아니라 비록 연약하나 그것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존재와 생명의 관계인 아들로서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아들의 나라요 우리의 죄 사함이요 구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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