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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후반부는 누가복음에는 없지만 마태복음 6장 13절에는 ( ) 안에 “대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이라는 말씀이 있고, 주석에는 ‘고대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성경에는 지금 우리는 한 권으로 보지만 원래는 두 권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21장이라던가 마가복음 16장 14절 이후와 같은 성경들이 있다.

 

이렇듯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이 적은 성경에 이후에 사도들이 추가한 내용들이 있게 된 것은 전부 교회 시대가 시작되고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 더 확실하게 깨우쳐지면서 이것을 이전에 기록된 내용들을 보강하거나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성경은 대단히 함축적인 표현들이 많다. 요한복음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다 기록한다면 책을 세상에 두기도 힘들다’했다. 예를 들어 마태를 부르실 때 “나를 좇으라(마 9:9)” 기록된 것이, 단순히 마태에게 그 말 한마디 했다고 따라갔다고 보면 곤란하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가 성경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해보니 그 모든 말씀과 그 때의 부르심이 “나를 따르라”하신 것이구나 깨달아져서 기록한 고백적인 기록인 것이다.

 

그것처럼 주기도문에 나오는 “대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라고 하신 것도 마태가 교회 시대에 성경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니, 앞에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들을 자기의 의로 삼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 보였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구나 하는 것이 또한 깨달아졌으며, 그것을 보니 그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고, 그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보여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때 가르치신 것이 생각났거나, 깨달아져서 기록에 함께 넣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기도는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가 이루어진 나라, 즉 교회 시대에 보는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영광과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기도인 것이다.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곧 모든 뜻을 가지신 아버지가, 내 안에서 소유와 공로를 좇는 내 마음에 있는 다른 신들과는 거룩하게 구분되어 임하여 주시고, 그 뜻이 하늘이 바뀌면 땅이 바뀌듯 흙으로 지으신 내 인생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아버지의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의 뜻 곧 그 창조목적을 감당하게 하셔서 우리의 죄(채무)를 없게 하시며,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아들 삼으시기 위하여 인생을 만드신 목적과 다르게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여기지 않게 하시고, 또한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게 하시며, 세상의 본질과 형식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험에서 이기며, 연약한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다는 악한 생각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나라, 그 나라가 곧 교회이며 그 나라의 영광과 권세가 생명관계로 만난 하나님, 곧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나라를 ‘죽어서 가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라이 임하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율법과 복음은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눅 16:16)” 말씀하시므로 예수님이 오심으로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됨을 말씀 하셨다.

 

“율법과 복음은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눅 16:16)”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여기게 된 것은 <죽어서 가는 천당>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이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던 간에 천국에서의 삶은 다르다는 보편적인 동의를 이끌어낸 큰교회들의 가르침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큰교회들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은 큰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라 여길만한 것이 그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인데, 먼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망상이 소유와 행위에 제약과 부족함이 없는 곳이라 여기기 때문에 육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현세의 큰교회 안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큰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교리 외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야구선수가 프로선수로서 그라운드에서 경기를 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 전에 야구선수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라운드에서 야구를 할 만한 이유가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법이 그러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는 것이다. 즉,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지 못한 사람은 죽어서도 하나님 나라를 갈수가 없다는 것이다. 뭔지를 알아야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땅에서 꿈꾸었듯이 소유와 행위에 제약이 없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 여겨 죽어서도 그런 나라를 찾아 간다면 필시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면서 살아본 사람이라야 죽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신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의로 세운 나라에 합당한, 그 나라의 의가 내 의가 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셔서 나로 하여금 그 나라를 이 땅에 살면서 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그 나라는, 율법을 먹을 것으로 삼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렸을 때 죽지 않으며, 보이는 것이라고 본질이라고 여기거나,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여기는 나라가 아니므로,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게 된 사람들이 모인 나라,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곳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인생들이 모인 곳, 즉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 나라의 권세와 영광은 잘 짜여진 조직과 예산에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아버지께 권세가 있는 것이지, 화려한 건물이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모여있는가?’ 하는 것이나, ‘한 해 예산이 얼마냐?’ 라던가, ‘교인수가 얼마냐?’ 라던가, ‘신비한 일이 얼마나 일어나느냐?’에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곧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 그것에 영광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의 큰교회들은 주님 가르치신 기도의 극한의 반대편에 서 있다. 그 교회의 권세는 돈 많은 사람들이 모인 당회와 그들이 짜 놓은 예산과 조직 안에 있고, 영광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파이프 오르간이나,  수십억짜리 건물을 지어놓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그 영광 아래에 스스로 머리 조아리고 들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시험하던 그 마귀의 시험에 굴복한 것인지는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죽어서 가는 나라로 가르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모인 곳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칭할 수 없는 양심을 하나님이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물이 좋아 질수록, 성가대 소리가 더 음악적 완성도가 높을수록, 교인수가 더 많을수록 영광스럽다고 여기는 신앙 안에는 아버지가 영광을 받고 권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짜여진 조직이 권세를 가지고, 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권세를 가지고, 교인수가 더 많은 교회가 권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되는데 너는 안 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적어도 너에게 복음이 될 수 없다. better better 하는 것이 복음이라면 그렇지 못한 모든 것은 다 죄인이 된다. 그렇게 죄인 되는 그 기준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예수님이 되기에 나도 되는 복음> 바로 그것이다. ‘그 초라한 꼴로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냐?’며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의 관점 같이, ‘교인도 얼마 안 되는데 무슨 교회냐?’ 라고 하는 관점, ‘노래를 그 따위로 하면서 무슨 성가대냐?’ 하는 그 관점 아래서는 많은 사람이 죄인 될 수 밖에 없기에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큰교회들은 사회적으로 더 나아짐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며,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해도 그것을 책망하건만 전혀 돌이킬 생각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주기도문을 교회 안에서 아무리 해 봤자, 그건 진정한 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아니 그저 주술과 주문에 가까운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이 땅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의를 자기의 의로 삼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늘 우리가 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정말로 드리는 존재가 되려 한다면,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소유와 공로에 또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생명 관계, 그리고 교회 조직체가 아니라 생명으로 이루어진 생명 공동체가 되게 하는 존재성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되도록 먼저는 내 안에 주님의 기도가 온전히 이루어짐으로 그런 사람들이 모였을 때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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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13-17 흑암의 권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2. 9. 14:26 Writer : 김홍덕

<흑암>이라는 것은 빛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빛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빛>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이다. 빛이 있기 전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창세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빛이 있기 전에는 공허와 혼돈 그리고 흑암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과 흑암은 공존할 수 없는 상반된 개념의 세계인 것이다.


<빛>은 광선이나 조명에 국한된 표현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세상의 빛(요 12:46)이라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어떤 것이 밝아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를 잘 모르는 사람을 ‘컴맹’이라고 한다. 컴퓨터에 대하여 어둡다는 이야기다. 성경에 나오는 어두움과 흑암은 바로 이런 어두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성경에 나오는 어두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어두움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어두움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어둡다는 것은 세상 전부에 대하여 어두운 자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생명이시니 어둡다는 것은 생명에 대하여 어둡다는 것이요, 그것은 또한 죽음 가운데 있다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는 존재와 상황 안에는 생명도 없고, 하나님의 계시도 없고, 세상에 대한 이치도 알지 못하는 어두움 곧 흑암의 권세만 있다는 것이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존재 목적과 사용 방법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것들에게 늘 부딪히고 박히고 하며 고통 받게 된다. 그리고 두려워 지게 된다. 집에 있는 내 방이라 할지라도 빛이 없으면 그 안에 있는 책상에게도 부딪히고, 선풍기도 넘어뜨리게 되고, 바닥에 놓인 것을 밟아서 발이 아프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빛이 없으면 책상을 공부하는데 사용하지도 못하고, 선풍기를 바람을 일으키는 것에 사용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곧 어디에 부딪히고 망가뜨릴까 싶어 조심하게 된다.


태양이 뜨고 조명이 들어온다고 해서, 또한 육신으로 맹인이 아니라고 해서 빛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닥치는 일들과 세상에 존재하는 일들과 상황에 늘 부딪히고, 다스리지 못하기에 오히려 자신이 상할까 늘 두려워하여 조심하고 보험 같은 대책들을 강구하고, 결국 종교를 찾아 자신에게 닥칠 일들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려고 한다. 이런 인생들의 모습이 빛이 없는 방에 들어가는 사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즉 모든 인생이 흑암 중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마치 어두운 방에 들어가며 조명을 켠 것 같이, 인생이 가진 모든 어두움을 물리치고 밝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모습을 통해 인생으로 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빛>을 만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 오히려 인생의 빛이 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연약한 육신의 한계를 수용하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셨는데, 지금의 큰 교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려 돌아가셨다는 그 명제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의 가치관을 좇아가고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초라한 인생인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못 박았다. 그들에게 메시야는 그런 초라한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와 같이 지금의 큰 교회들도 사회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친다.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같은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단지 BC의 시대가 아니라 AD의 시대를 산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유대인과 다르다고 생각하니 그곳에 제대로 된 신앙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큰 교회들이 추구하는 것과 같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잘 살수록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된다는 것은 물질만능주의로 타락한 종교적인 폐습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 관점으로 살고 가르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오히려 십자가에 죄인의 모습으로 달려서 기적적인 능력으로 내려오지도 못하고 엘리야도 나타나지 않는 그런 연약한 인생의 모습이 드러나는 모습을 볼 때, 그 모습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빛>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연약한 인생을 인정하고 위대해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라, 세상적인인 가치관이나 지금의 큰 교회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자기의 모습이 죄인으로 발견되는 줄 알지만, 그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하신 모습임을 알고 선언하고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빛을 만난 삶인 것이다.


반면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시려 돌아가셨다는 명제만 교리로 가져오고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연약한 예수님은 버리고 세상적인인 성공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흑암의 권세>이다. 그런 생각은 교회 안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에 어두움임에도 아무도 거리낌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가게 하는 그 힘이 바로 <흑암의 권세>인 것이다.


세상적인으로 보면 모든 채용에 있어 시험을 통해 그 능력이 입증된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동의를 받는다. 그런 암묵적 동의를 일으키는 힘이 바로 <흑암의 권세>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법으로 세상을 만드시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생명 관계로 만나시기를 원하시지만, 세상은 늘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종의 신앙관으로 운영되는 것이 진리라고 암묵적인 동의를 이끌어가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것을 성경은 <흑암의 권세>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흑암의 권세는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큰 교회들 안에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성가대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찬양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위대해지는 노래를 듣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찬양으로 받으신다. 음치일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음악적으로는 듣기에 좋지 않다 해도 찬양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받아가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어야 하는데, 지금의 큰 교회들은 흑암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다 보니 성악과 출신들에게 돈을 주고서 성가대를 운영하려 하고, 그것이 옳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그 모든 교인들이 다 흑암의 권세 아래에 있는 것이다.





흑암의 권세는 세상적인인 가치관과 방법이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는 힘을 말한다. 목사를 뽑을 때, 신앙고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역량을 나타내는 약력을 보는 것에 모두 동의하는 힘이 바로 흑암의 권세이다. 그렇게 보면 흑암의 권세가 얼마나 우리의 마음 안에 깊숙이 있는지 놀라운 것이다. 돈이 기준이 되는 것, 인간적인 능력이 기준이 되는 것, 나에게 얼마나 유익이 되는가가 기준이 되는 그런 모든 것으로 사람을 대하고 신앙생활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그것이 바로 흑암의 권세인 것이다.


바울사도는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골 1:13)” 이라 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밝음과 안목 아래에 가면,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의 법으로 살게 하셔서, 마치 불 켜진 방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그 용도대로 사용함으로 갈등이 없듯, 세상을 살아감에 평안과 감사함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 빛이 있는 곳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사랑의 아들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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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9-12 빚과 기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2. 7. 23:02 Writer : 김홍덕

사도바울 사도는 우리가 빚진 자라 했다.(롬 8:12) 이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다 빚진 자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돈을 빌린 것도 아닌데 왜 빚진 자인가? 이것은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창조한 존재는 피조물에게 목적하는 바가 있고, 물건을 사는 사람은 그 물건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 그 목적과 기대하는 바가 바로 <빚>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빚을 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으시다는 말씀이고, 빚진 자는 갚아야 하듯, 우리 인생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그 때에 두신 목적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옛날 유대인들에게는 <죄>라는 말과 <빚>이라는 말은 거의 같은 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에 나오는 죄는 영어로 sin이 아니라 debt이다. 즉 채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빚을 갚지 않는다는 것이 곧 죄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빚진 자가 그것을 갚지 않는다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빚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라면, 우리가 그 목적 아래 있지 않으면 바로 죄인이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다 죄인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요 12:46)

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사람들이 다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하심인데, 이는 빚진 자들이 빚을 갚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빚 갚는 것에 관하여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구속 곧 죄 사함이요 빚을 갚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려 했다. 즉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의(義)’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 성경으로 볼 때 구약시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역설적으로 성경말씀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모든 사람은 그 안에 아직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은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지금의 큰 교회들이 하나같이 다 그렇다. 교회에 봉사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과 같은 것을 잘 할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친다는 것은 아직 율법의 세계에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인 이유가 있다. 율법의 세계에 있다는 것은 빚에 대하여 갚아 나가는 종의 신앙의 세계에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종이라는 신분은 늘 공로로서 주인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다. 기도를 더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잠깐 짚고 넘어 간다면, 그 존재가 기도가 되고 찬양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기도 그 자체이다. 기도라는 것이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기에,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으로 말미암았으므로 존재 자체가 기도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종은 늘 공로가 될 수 있는 일을 함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빚이라는 것은 언제나 빚이다. 인생의 전부를 하나님 앞에 율법을 지키는 것에 소비하는 종일뿐이다. (신약의 말씀도 행위로 지키려 하면 다 율법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빚이 우리의 기업이 되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기업은 다른 말로 몫이요, 분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두신 그 목적이 우리의 본성이 되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를 볼 때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또한 우리의 모습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임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 이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전쟁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생의 모습으로, 또한 우리가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 죄인이기에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법으로 죄인 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단번에 드려지는 제사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것을 볼 때, 그 사건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목적이 내 것이 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하며 사는 것이 종과 같이 행함에 있지 않고 아들과 같이 본성이 됨으로 인하여 아들이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받듯, 아버지의 모든 것이 나의 몫이 되듯, 또한 아버지의 모든 것이 아들의 분깃이 되듯 나의 것이 됨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이전에는 빚이었다가 십자가를 볼 때 자신의 모습이 그 모습임을 고백하는 그 하나만으로 이전에 빚이었던 것이 몫이요, 기업이요 분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속량이고 구원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골로새의 교인들에게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의 말씀은 이전에는 우리에게 빚이요 죄였던 하나님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버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아들이 됨으로 그 목적이 나의 본성이요, 분깃이요, 기업이요, 유산이요, 몫이 되게 하시는 그것을 감사드리기를 원한다는 것이니, 이는 성경의 모든 것이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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