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은 멀쩡한데 정신을 빼앗긴 귀신 들린 것, 하나님의 말씀을 느끼고 깨닫지 못하는 문둥병,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중풍 같은 육신의 삶. 성경에 나오는 병들은 이같이 정상적이지 않은 하나님과 사람 관계, 곧 죄로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의 상태를 죄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런 병들을 고친 것은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를 사한다는 것을 보여주심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나 한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생명이 되는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죄를 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도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네 죄가 사함받았다.”고 하신 것같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
하지만 어지간해선 사람이 죄를 사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유는 자신을 볼 때 죄 없다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 역시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의 행위를 보고 죄라 하지 않는다. 행위는 존재 정체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행위 이전에 그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정체성,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다.
여기서 죄의 개념까지 상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사람의 생각처럼 행위가 아니라 정체성이 죄의 기준이다.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 아담에게 물으신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이 하나님이 보시는 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다면 중풍 병자와 죄사함이란 관점에서 조명해 볼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죄를 사하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과 같은 죄의 개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의 죄는 당연히 하나님의 개념이기에 예수님께서 사하시는 죄 역시 정체성에 관한 죄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사람은 행위를 죄의 기준으로 삼기에 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이니 다른 사람도 죄인인 상황에서 누가 누구의 죄를 사할 수는 없다.
예수님을 마주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이것을 보여준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냥 사람, 그것도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나사렛이란 천한 동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일 뿐이었데, 그 예수께서 사람의 죄를 사했다고 말하니 강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혹은 신으로 인식하는 지금도 죄에 대해선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
앞서 전도를 이야기할 때, 전도란 거듭난 사람,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과,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자 자기가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할 모습으로 깨닫고 믿으면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므로 또 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임을 설명했다.
말씀이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역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보고 믿음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삶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이 거듭남이고 전도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거듭난 사람에게 죄가 없듯, 예수님을 보고 거듭난 사람을 보고 거듭난 사람 역시 죄가 없다. 죄가 있는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 있도록 먼저 그리스도로서 삶을 산 사람의 삶은 새롭게 거듭난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와 사도들의 삶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다른 사람을 죄에서 구하고 죄 사함을 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자, 곧 사람이 죄를 사하는 권세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막 2:10)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보이셨음에도 사람은 사람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심지어 오늘날은 다른 사람의 죄는 고사하고 자신도 죄가 없다고 믿지 못한다. 교회에서 기도를 가르칠 때 먼저 회개부터 하는 것은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 믿지 못함이다. 회개는 죄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같이 분명하고 쉬운 복음 앞에서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죄가 무엇인지, 거듭남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신앙인은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희망 사항일 뿐 자신도 자신이 죄 없는 존재라는 확신이 없는 상태를 거듭난 상태라고 하는 모순과 어두움 속 희망 고문일 뿐이다.
또한 이 어두움 속 신앙인들은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치유는 육신의 병을 고치는 기적으로만 본다. 병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상태를 보여주는 형식이다. 예수님의 치유는 그 관계의 회복, 곧 죄를 사함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거듭남과 구원과 죄와 예수님 치유의 본질적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모든 게 죄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서 노력하는 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신이 된 말씀이 없기 때문이고, 삶을 이끌어갈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 상태가 죄다. 그리고 우리 육신 곧 삶이 돼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인생의 목적이다. 이것에 대하나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은 죄인의 모습인 중풍 병자 같은 모든 사람 말씀이 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육신이 깨어지므로 육신이 된 말씀을 드러내셨다.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자신을 발견하면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예수님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다른 사람의 죄도 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래서 중풍 병자에게 죄를 사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고치신 중풍 병자의 모습에서 말씀이 삶이 되지 않은 자신이 발견될 때 구원이 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한다고 말씀하신 일이 자기 일이 되고 또 남의 죄를 사하는 사람이 된다. 이런 신앙의 여정과 고백 없이 구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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